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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Jun 30. 2024

<프렌치 수프> 오래 뭉근하게 익어가는 요리, 삶

흙에서 당근을 뽑고, 상추를 밑둥부터 잘라낸다. 땅의 기운을 품은 재료들을 버터라기보다 정성의 풍미를 더해 볶고 데치고 굽는다. 뭐하나 단순하게 후딱 해내는 요리가 없다. 오래 뭉근하게 익어가는 시간을 아는 어른들. 미식도 나이든 이의 몫이란다ㅋ

원제는 '도댕 부팡의 열정'(La Passion de Dodin Bouffant). 남자주인공 도댕 부팡의 이야기가 원작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유명세를 담당한 것은 줄리엣 비노쉬. 한국 제목이 '프렌치 수프'가 되어버린 연유는 알듯 모를듯. 다만 영화에서 프렌치 수프 '포토푀'를 만드는 과정은 아름다움을 넘어 숭고할 지경이다. 19세기 말 부엌은 모든게 노동이다. 물 긷는 것부터 식재료를 씻고 손질하고 다듬고 뭔가를 만드는 과정이 섬세하다. 고기와 채소를 끓여내고 불순물을 걷어내고, 이 과정을 넋놓고 지켜보게 만드는 영화다. 부엌의 고수와 하수가 저마다 제 몫을 하는게 오케스트라 협주 같다. 마침내 상대가 음식을 씹고 오물거려 삼키는 모든 과정은 서로의 절정이다. 섹스보다 음식이구나.


트란 안 홍 감독의 <그린 파파야 향기>(1993)나 <씨클로>(1995)는 솔직히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뭔가 짜릿하고 여운이 길었다는 느낌만 어렴풋. 그는 이번 영화로 칸느 감독상을 받았다. 맨날 칸느 어쩌고 해도 실제 관객은 별 관심이 없는게, 오늘 극장에 관객이 4명 뿐이었다.

하지만 장면마다 명화 느낌을 내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도댕의 친구들과 모인 장면마다 누군가 서서 그림 같은 장면의 균형을 잡는다. 지루하게 뺑 둘러 앉은 장면이 아니라 묘하게 설정된 자리와 자세가 그 순간을 박제한다. 부엌의 모든 구석이 얼마나 세심하게 안배됐는지,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새삼 절감한다. 자신의 일을 사랑한 두 요리사의 세월이 녹아있는 공간이다.

별다른 스토리 없이 부엌이나 식탁 장면만으로 빨려들게 만드는 건 확실히 감독의 힘이다. 여기에 주름마저 애틋한 줄리엣 비노쉬(외제니)가 있다.

한때 사실혼 관계였다가 20여년 전에 헤어졌다는 줄리엣 비노쉬와 브누아 마지멜은 어떤 마음으로 이 멜로를 찍었을까. 나이든 두 사람의 마음은 뜨겁기 보다 따뜻한 온도, 일로 존중하는 매너가 우선이다. 문을 두드리는 남자, 그런 남자를 상상했던 여자. 인생의 가을에도 사랑은 무르익는다. 도댕이 외제니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장면에서 이 사랑 열렬하게 응원했다. 다만  어른의 멜로치고는 전라 뒷태 빼고 12세 관람가라니... 음..


폴린이라는 고혹적 소녀가 나오는데, 한때 줄리엣 비노쉬에게 매료됐던 옛 추억이 소환된다. 세월이 선수 교체하는 느낌을 어린 배우의 등장으로 인지하다니. 게다가 도댕씨.. 뛰쳐나가는 모습과, 이어지는 도댕과 외제니 대화가 먹먹하다. 이것이 인생?


요리 감독 피에르 가니에르의 요리를 먹어보고 싶게 만드는 영화 인정. (잠깐 그가 출연한게 유라시아 왕자의 셰프였다니!) 고급 프렌치에 대한 관심이 없다가도 생길 지경이니 요리관심 많은 내겐 희망고문 같다. 프렌치가 아니더라도, 저렇게 시간 들이는 요리를 하고 싶어졌다. 직딩맘의 휘리릭 마냐밥상 대신, 오래 지지고볶고 그런거 하고 맛도 보고 싶다니까아아아아..

#마냐뷰 #프렌치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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