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불허전, 필립 파레노 전시 '보이스'는 듣던대로 신박했다. 오늘이 마지막날이라고 해서 기어이 달려갔다. 리움미술관, 사실 처음 가봤다. 'Lee'의 'um'이라니 새삼 대단하지.
용인 호암미술관에 갔을 때, 이 나라 멋쟁이들은 다 모였나 싶었는데 오늘 딱 그랬다. 부티나는 사람들이 우아하게 스쳐갔다. 귀티나는 젊은 커플의 꼬마는 그림 같이 예뻤다. 아이를 데리고 전시를 보는 건 유한계급의 종특. 나 역시 유한마담을 흉내내는 기분.. 이건 전시 직전의 감상이다. 막상 전시장에 들어서자..2시간 여 몰입했다.
인상적인 순서대로..
200년 전 스페인 화가 고야는 말년에 마드리드 외곽의 시골집에 14점의 벽화를 그렸다. 어둡고 기괴한 화풍의 벽화는 현재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소장품. 필립 파레노의 작품은 박물관에서 벽화를 촬영한 38분짜리 영상이다. 빗소리, 바람소리는 음울하고 고해상도로 잡아낸 벽의 질감은 차갑고 거칠다. 사람들 표정은 고통과 절망의 어느 경계에 있고, 시골집 어두운 복도의 음울한 시간을 영상으로 되살렸다.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트루누스'를 비롯해 흑막 그림은 물론 소리와 음악이 신경을 긁어대는데 작품 이름은 '귀머거리의 집'이다. 이걸 38분이나 견디라고 하다니 필립 파레노는 변태구나.
당시 무자비한 왕의 폭정에 질린 고야는 그림에 부서진 영혼을 담은건가.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ㅠ
애니메이션 캐릭터 '안리Annlee'가 등장하는 '세상 밖 어디든'은 4분짜리 영상. 그녀는 4만6000엔에 원본 이미지 저작권이 팔린 캐릭터라고 본인을 소개한다. '생존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은' 그저 상품. 그러나 안리는 목소리를 빌려서 말한다. '나는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고. 필립 파레노는 안리 저작권을 구입한뒤 그 권리를 포기, 안리의 이미지는 오롯이 안리에게만 속하게 됐다. 안리가 빌려온 목소리는 배우 배두나의 것인데 진짜 안리는 어디까지일까? 캐릭터든 상품이든, 이미지를 파는 배우든, 그 존재의 권리는 누가 결정하는가? 4분여 속으로 계속 질문을 이어가게 만드는 작품이다.
전시장 바닥과 천장에서 유영하는 알록달록 물고기, 혼자 연주하는 피아노도 인상적이었지만 벽이 움직이는 것도 충격. 벽이 움직인다.. 반딧불이 세밀화 스케치를 스크린에 옮겨낸 작품도 놀랍고..필립 파레노는 평범한 일상의 오브제를 다르게 바라보게 한다. 전시마다 한번 더 생각하고 뒤집어 보게 하다니.
문득 영감 압박에 시달리는 예술가도 못해먹을 짓인지 아닌지 궁금해졌다. 영감을 마르지 않는 샘 마냥 관리하면서 뭔가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가혹하고, 그저 남들과 다른 관점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면 온통 재미난 작업 대상이 가득할 법도 하고.. 어느 쪽이었을까.
마릴린 몬로의 시선으로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스위트를 설명하는 영상도 짜릿했다. 유려한 필체를 따라가다가 마지막 반전도 할말을 잊게 만드는 수준이었는데, 나는 엉뚱하게도 주황색 스탠드 불빛에 매료됐다. 노란색과 주홍 소파를 비롯해 소품을 다시 보면서 내가 오렌지색을 좋아했던가? 혹시 초록 스탠드는? 이런 색의 상상을 이어가본 건 디자인맹인 나로서는 매우 드문 경험이다.
다르게 보는 한 끝 차이가 기막힌 맛집. 고마운 친구 E 덕분에 이 전시 놓치지 않아 다행. 일요일 오전 몇 시간 나들이로 이렇게 사람이 촉촉해진다.
ps. 점심은 라페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