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말랑한 책을 청하셔서 반성하고 쪼끔 말랑하게 가보려고 해. 게다가 판타지라니, 공장장의 넓은 취향에 감탄하며 바로 떠오른 작가가 있어. 정보라 작가님. 아마 아는 분이 훨씬 더 많겠지만 고작(!) 10만부 밖에 안 팔렸다고 하니 소개해볼게. 《저주토끼》.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를 활용하여 현대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참혹한 공포와 잔혹함을 이야기한다.” 부커 라이브러리 평이야.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였어. 2017년 처음 나왔을 때는 그렇게까지 주목받지 않았는데 이후 역주행했지. 국내에서 10만부가 팔렸고 전세계 24개국에 번역 판권이 수출된 책이지. (왼쪽 사진이 원래 표지. 오른쪽은 10만부 기념 에디션. 영국판 표지였다고)
영국의 부커상은 2016년 한강의 '채식주의자' 수상 이후, 정보라, 천명관, 황석영 등의 작품들이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면서 좀 친숙해졌지. 3대 문학상이라고도 하는데 역대 수상작 중에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 마이클 온다체 <잉글리시 페이션트>, 얀 마텔 <파이 이야기>,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처럼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들도 많아서 우리에게 더 익숙하고.
정보라 작가님은 <너의 유토피아>라는 소설집도 작년에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의 ‘2024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고, 올 1월에 필립 K. 딕 상 후보로 올라서 또 화제가 됐지. 원래 2021년에 <그녀를 만나다>라고 출간됐다가 영어 번역본 제목으로 올해 초 재출간됐지. 한마디로 글로벌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작가님이야.
“오싹한 반전 효과를 극대화하며, 우리 스스로 기꺼이 함정에 발 딛게 한다” - NYT,
“숨이 턱 막히는, 거친, 미친, 내가 만난 가장 독창적인 소설!” - 퍼블리셔서 위클리
너무 유명해서 살짝 펼쳐봤다가 끝까지 다 봤음. 서점에서 퇴근도 못하고 그냥 봤음. 도저히 멈출 수가 없는 종류의 책. 표제작 저주토끼는 정말 귀여운(?) 토끼에 대한 이야기인데 할아버지에게 저주토끼 관련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듣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마지막 반전까지 나무랄데 없이 훌륭해.
‘머리’라는 작품이 있는데 솔직히 화장실 변기에서 머리가 튀어나오는 상상 해본 적 없어? 너무 무서웠음. 현실에 발딛고 서서 있을 법한 오싹한 상상들을 아주 술술 풀어내는 스타일. 정보라 작가님 아직 안보신 분이 있다면 서점에서 들춰보기만 해. 헤어나오기 힘들거야.
베스트셀러라는 점에서는 《저주토끼》보다 몇 수 위라고 볼 수 있지. 글로벌 베스트셀러, 고전에 가깝지. 저주토끼가 10만부 에디션이 나온 것 처럼 이 책도 작년에 개정판이 나왔어. 나는 2000년대 초반에 본 책이야. 《팔레스타인》. 만화야.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르는 서양 만화.
조 사코라는 작가가 90년대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취재하고 그렸어. 여러 권의 만화를 묶어서 미국에서 나온게 2001년이고, 2023년 말 이스라엘-하마스 사태가 다시 불붙으면서 이 만화도 다시 소환됐지. 미국에서 재출간되면서 한국에서도 개정판으로 이번에 다시 나왔어. 《팔레스타인》은 아트 슈피겔만의 《쥐》, 마르얀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와 함께 그래픽노블 3대작으로 꼽히기도 해. '만화 저널리즘' 장르를 개척했다고.
조 사코, 작가가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해. 가자 지구를 방문한 미국인 관찰자, 제3자 입장으로 직접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전해.
일상적 굴욕, 집이 파괴당한 가족들의 이야기, 감옥에서 고문당한 사람들의 증언 등 구체적인 경험담이 이어지고, 자신들의 역사와 삶을 되찾으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나와. 인간적이고 때로는 해학적인 시선으로 그들에 대한 연대감을 드러낸다는 평이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농담 중 이런게 있다고 해.
KGB와 CIA와 이스라엘 정보부 셋이 만나서 누가 빨리 토끼를 잡아오는지 내기를 하지. CIA 요원이 숲에 들어가 10분 만에 잡아오지. 다음에 KGB 요원이 5분 만에 잡아와. 그런데 이스라엘 정보부 사람이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오는거야. 들어가봤더니 말을 붙잡고 “너 토끼라고 자백해!!!”라고 고문하고 있었음..
유머도 살짝 들어갔는데 누구도 유머로 받아들이기 힘들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어떤 고난을 겪는지 적나라하거든. 나는 가로 60cm, 세로 80cm, 높이 2m 상자 안에 갇혔던 여자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어.. 좁은 공간에서 꼼짝 않고 서 있으면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고, 결국 기절까지 하지.. 상상해보면 끔찍해.
조 사코는 개정판 서문에 부쳐 30년 전의 팔레스타인과 지금 팔레스타인의 상황이 아직도 진행 중임에 슬퍼해. 근데 사실 '아직도'라고 하면 안될거 같아. 더 나빠졌어. 그때만 해도 건물은 서 있었고 학교와 병원은 제 기능을 하고 있었지.. 지금은 아니지.
“이제 인티파다의 실체를 확인하러 가자! 어디로 가야 하지? 병원이다! … 여기 아이들은 어떻게 된 걸까? 이 소년은 오늘 아침 실려 왔다. 집에 있는데… 총알이 벽을 뚫고 들어왔다고 한다. 이 소녀는 학교 운동장에서 맞았다. 여러 발의 파편을… 함께 있던 아이 중 하나는 죽었고 다른 하나는 부상을 당했다.”
작품은 좋은데 현실을 바꾸진 못했지. 그런 얘기가 30년 전에도 나와.. “50년 동안 사람들이 찾아와서 우리 이야기를 적어 갔소… 인티파다 이후에는 세계 각지의 기자들이 찾아오더군. 팔레스타인 어디를 가도 기자들이 있소. 처음에는 그들이 너무 반가웠지. 모든 걸 다 보여 주었소. 하지만 그래서 팔레스타인에 뭔가 보탬이 되었소? 뭐가 바뀐 게 있소?”
총 대신 펜으로, 증오 대신 공감으로
야만적인 폭력 앞에 선 인간의 삶을 그린
최고의 그래픽노블.. 이라는 소개가 가장 명료하네. 그림체도 잊혀지지 않는 스타일이야. 좀 두껍고, 좀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우리가 세상 어찌 돌아가는지 알아야지. 우리가 그런 야만의 시대를 건너왔다는 것도 새삼스러워. 아직도 그런 지옥이 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