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에 대한 회의가 더 커지다
『철학 논쟁』은 과거부터 뜨거운 논쟁거리였던 '자유의지론이냐 결정론이냐'에 대해 두 명의 철학자가 토론한 것을 실은 책이다. 대니얼 데닛은 자유의지론과 결정론이 양립할 수 있다는 양립가능론자로, 인간은 주체적인 행위자로서 성장하면서 통제력을 가지므로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양립불가능론자이자 자유의지회의론자인 그레그 카루소는 운이 강하게 작용하는 이상 인간에게 응분에 따른 도덕적 책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가지의 개념을 가지고—특히 법적 처벌의 근거로써 응분의 몫에 대하여 치열하게 토론한다.
이 책의 쟁점은 인간의 의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에 대한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인식하는 작용 자체가 온전히 우리의 자유의지로 이뤄지는지 아니면 통제할 수 없는 요소에 의해 인과적으로 결정되는지를 따지는 문제 말이다. 만일 의식이 행위자의 자율에 의한 것이라면 데닛의 말대로 인간은 응분의 몫을 질 필요가 있겠고,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다른 근거—예방 차원의 구금 등—를 들어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이 맞다. 그러므로 인식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어떤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올지도 정해지겠다.
영국의 저명한 행동과학자 닉 채터에 따르면 의식이란 현재 지각한 것을 예전에 축적해 놓은 경험과 연결하고 재구성한 다음 우리가 새로운 것을 산출해내는 과정이다. 여기서 지각과 경험이라는 두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지각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전자로 구성된 감각기관을 이용해서 하는 것이니 카루소의 말마따나 구성적 운에 의해 정해진다고 볼 수 있다. 경험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느 나라에서 태어날지 어떤 집안에서 자라게 될지와 같은 현재적 운에 맞닥뜨리므로, 마찬가지로 이미 결정된 것이다. 그래서 의식은 '운에 의해 정해진 것 두 개를 조합해서 새로운 것을 산출해내는 과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므로, 의식이 우리의 자유의지가 아닌 운에 의해 정해진 결과물로 여겨진다.
이 관점에서 토론을 바라보면 데닛의 손을 들어 주기 어렵다. 그는 과거는 행위자가 아니므로 나를 통제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과거의 경험은 앞서 언급했듯 현재 지각한 것만큼이나 의식에 큰 영향을 주는 요소이므로 인간에게 족쇄로써 통제 기능을 한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그래서인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들 중 일부(어쩌면 대다수)는 어린 시절을 겪은 고생과 부당한 상황으로 인해 남들보다 일찍 자기 통제력과 책임감을 갖춘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라는 대목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부조리한 운을 인과적인 요소로 설명하고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 카루소의 의견이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통제로부터 전혀 구애받지 않는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없지만, 각자 어느 정도의 주체성은 분명 가질 수 있다. 데닛이 인간은 교육 등을 통하여 변화하고 성장하면서 주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어 간다고 주장한 것에는 동의한다. 세상과 사회를 이해하면서 자기 자신이 통제되고 있음을 깨닫고 이에 순응하거나 저항하기를 선택할 수 있어서이다. 다만 그마저도 적정 수준의 두뇌나 좋은 학군과 같은 교육환경 등을 요한다는 점에서 운의 영향 아래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즉 주체자로서 실존하는 우리는 정말 큰 행운을 갖고 살아가는 셈이다. 그러므로 미국 공화당처럼 ‘(전부) 우리가 일구었다!’라는 당찬 말보다는 겸손한 태도를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