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휴게소

버스는 떠나고

by 화월

원래 저녁 모임이 있어 4일 남은 연차 하루를 쓰기로 했다. 점심에 나경님과 막걸리에 고등어조림을 먹고 귀가해서 잠이 들었는데 눈 떠보니 약속시간이었다. 저녁 모임을 마치고 심야버스를 타고 순천으로 향하기로 했는데 일정이 틀어졌다. 모임을 주최하는 형님의 양해로 저녁 모임은 참석하지 않고 간단히 저녁을 먹고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424C 구역 복도식 아파트 미성아파트를 뛰어다닐 때마다 내려다보던 터미널에 오늘은 여행객으로 서본다.


일단 출발부터 실수이다. 순천을 가는데 버릇처럼 경부선로 항해 운행표를 보니 영남과 강원으로 가는 버스만 보여 순간 실수를 인지하고 호남선으로 향했다. 22시 30분 심야버스를 택했다. 총 출발인원은 9명이다. 여행은 언제나 설렌다. 일상을 떠나 별 계획 없이 낯선 도시로 한밤중을 질주한다 생각하니 여러 상상이 초가을 하늘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버스는 정시에 출발했고 4번 좌석을 취침자세로 펴고 누워 창밖을 보니 415 구역 롯데캐슬과 진흥아파트가 스친다. 지난 장마에 침수되었던 곳이다. 삶의 현장을 떠나 소설 <무진기행>의 무대로 떠나는 현실 여행의 주인공이 될 차비를 하고 2시간 30분을 달리는 동안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새벽 1시에 도착한 곳은 심야의 휴게소이다. 휴게소 이름도 모른 채 화장실을 들렀다가 출발 전 편의점에서 사 온 조지아 크래프트 블랙을 마시며 초가을 차가운 바람을 쏘이며 고독한 여행자가 되는 기분을 느끼려고 의자 대신 나무 아래 자리에 앉아서 쓸쓸하고도 적막한 여행길 심야 휴게소의 한적함을 즐기고 있는데 1시 7분 버스가 갑자기 떠난다. 버스 뒤를 쫓아 애타게 불러도 야속하게 주유소 옆을 쏜살같이 지나치더니 고속도로 사라진다. 황당했다. 승객이 9명인데 사람 숫자 확인도 안 하고 출발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한국이니까 망정이지 남미 대륙횡단 버스에 타다가 이런 일을 당했다면 버스에 두고 온 짐이며 가야 할 길을 무슨 방법으로 다시 찾는다는 말인가?


버스에 연락하려고 승차권에 적힌 천일고속 전화번호를 찾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일단 글씨가 작고 휴게소의 조명은 어두웠다. 간신히 휴대폰 사진으로 터미널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했는데 ARS 멘트만 나오고 휴게소에 버려진 승객을 선택하는 번호 안내는 안 나오고 상담은 낮시간 근무시간만 된다고 해서 난감했다. 인적이 드문 휴게소에 외롭게 남겨진 버스 여행자를 순천에 데려다줄 방법은 더욱 묘연했다.


인터넷에서 고속버스 회사 번호를 검색했는데 천일고속은 본사가 부산인가 보다, 우선은 서운 번호를 눌러 통화를 했으나 전화는 불통이다. 누군가 이 상황을 타개해 줄 담당자와 통화를 해야 하는데 기계 안내음뿐이다. 전화를 끊고 잠시 숨을 고르고 부산 전화로 걸었다. 다행히 연락이 되었고 나의 위치를 설명하던 중 이곳이 오수휴게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버스 기사와 통화에 성공하게 되었는데 구례 쪽이어서 버스를 돌려오겠다고 한다. 나도 그렇지만 애꿎은 버스 승객들의 시간 낭비는 또 어쩌란 말이냐? 버스 기사님도 나도 서로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이곳 휴게소에 한 시간을 앉아서 졸지에 심야휴게소를 관찰한다.


휴게소에서 작동하는 것은 화장실, 무인편의점 그리고 운수점을 치는 기계의 운명감정 음성뿐이다. 초가을 바람이 불어 시원한 심야 그러나 나는 버려져있다. 행크스의 영화 <빅>에 나오는 졸타라는 기계가 떠오른다. 나는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까? 이곳에 있지만 그다지 순천으로 가고 싶지도 않다. 뚜렷한 목표도 없지만 밤은 길고 언젠가는 도착하기 때문이다. 가끔 휴게소에 들르는 사람들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본다.


휴게소 외부 테이블서는 덩치가 제법 있는 두 여인은 컵라면과 컵밥을 뜨거운 물에 부어 맛있게 먹고 있고 보기에도 프로운전사 같은 완전 대머리의 중년 아저씨는 등산에 갖고 갈법한 취사도구에 불을 붙이고 라면을 끓이고 김밥을 곁들여 나무젓가락으로 먹고 있디. 라면 용기는 호일 소재로 된 사각도시락 형태인데 자글자글 라면이 끓는 모습이 한밤의 휴게소 풍경과 어울린다. 휴게소는 휴식과 포만감을 주는 곳이다.


이곳에 도착한 지 1시간이 지나자 한 시간 뒤에 출발한 순천행 금호고속 프리미엄 버스가 도착하고 서둘러 승객들은 화장실을 다녀왔다. 나처럼 버려진 승객은 없었다.


버스가 떠난 후 정확히 한 시간이 되자 구례까지 갔다는 버스가 돌아왔다. 특이한 점은 버스가 도착해서 버려졌던 주인공인 나를 찾는 운전수가 아니라 화장실이 급해 쏜살처럼 달리는 다른 승객이었다. 그렇게 그 승객이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또 잠시 기다렸다. 나는 겸연쩍은 인사말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렇다 쳐도 1시간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볼멘 목소리도 하지 않은 승객은 거의 부처님 수준의 참을성은 아닐까? 목표시간보다 1시간 늦게 순천 터미널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3시 15분이었다. 터미널에 줄지어 기다린 택시를 잡아 타는데 기사님이 한 말씀하신다.

"버스 어디 고장 났나요?"


우리는 모두가 불 꺼진 고속도로 휴게소에 까닭 없이 던져진 외롭게 던져진 존재이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역시 모르는 우리의 세상은 더 어두운 휴게소이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게 컵라면을 먹으며 떠들 수 있는 곳이다. 언젠가는 떠나야 할 휴게소에서 나만의 졸타에게 빌어본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어두운 휴게소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 날이 새도록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배송학 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