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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풍국 블리야 Sep 18. 2024

내 목표는 영주권이 아니다

22. 손님이 미어터지는 가게

영어 점수를 만들고 주정부 인비테이션을 받았지만 나는 영어 공부를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가게에서 나의 목표는 영주권이지만 영주권이 내 삶의 목표는 아니었다. 나에게 더 중요한 건 영주권을 받고 나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였다.


이 낯선 땅에서 내가 가진 건 '나 자신' 뿐이었다.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면서 이미 많은 걸 내려놓았다. 하지만 영주권을 받고 나서도 여전히 '캐나다에서 사는 삶' 그것만으로 만족하며 사는 이민자들의 삶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캐나다에 있다는 것이 모든 가치를 덮어버릴 만큼 내게 큰 의미는 아니었다. 영주권을 받는다고 나를 위한 인생이 마치 준비된 것처럼 원플러스원으로 따라오지 않는다. 이곳에서의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 책임은 나에게 있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지는 알 수 없다. 나의 직관을 믿을 뿐이며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영어 공부를 계속하는 일이었다.


영어 점수가 나온 걸 알게 된 사모님은 내가 학교를 그만두길 원했다. 학교 때문에 그동안 화요일과 목요일, 이틀 동안 줬던 오프닝을 클로징으로 돌릴 생각이었다. 학교를 계속 다니겠다고 하자 사모님은 이기적이라며 언짢아했지만 내 미래를 두고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가능했던 오프닝이 갑자기 불가능한 상황이 된 것도 아니고 보호대를 하고 있는 내 손목도 지켜야 했던 나는 5일 동안 클로징을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쉬던 수요일과 일요일 아침에 사장님 가족은 성당을 갔다. 그날은 오프닝을 할 사람이 무조건 필요했다. 그동안 로컬 아이들이 맡아왔지만 쉬는 날 일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은 그리 의욕적이지 않았고 간혹 당일이 되어 나오지 않기도 했다.


학교에 가는 걸 봐주며 오프닝을 주고 싶지 않은 사모님과 학교를 포기할 수는 없지만 이 문제로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나. 나는 쉬었던 수요일과 일요일을 반납하고 학교에 가는 화요일과 목요일, 이틀을 쉬기로 했다. 사모님 입장에서는 일요일에 일을 하겠다고 나서니 싫다 할 이유가 없었다. 화요일과 목요일 매출이 많아지면서 팁 수입을 더 기대할 수 있으니 로컬 아이들 입장에서도 환영이었다. 나의 미래 준비를 위한 직업탐방을 하기에도 주말보다는 주중이 나았다. 그렇게 쉬는 날을 바꾸기로 하면서 나는 이틀의 오프닝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주말은 평일보다 30분 늦게 문을 열어서 아침 시간에 좀 더 여유가 있었다. 수요일 점심은 한가했고 일요일은 심심할 정도였다. 일요일은 주로 교회를 다녀오거나 쇼핑몰에 나왔다가 점심을 하기 위해 오는 가족 손님들이 많았다. 새로운 손님들을 만나는 재미도 있었지만 그동안 봐왔던 손님들을 못 보게 된 것은 서운하기도 했다. 그러다 단골손님을 보게 되면 반가웠다.


"어? 블리야~ 너 일하는 스케줄 바뀌었어? 안 보여서 궁금했어~ 이제 수요일에 오면 되겠네~ 또 언제 일해?"


내가 일하는 날을 확인하고 간 점심 손님들이 수요일과 일요일에 오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오던 손님들도 방문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한가했던 수요일과 일요일 모두 시간이 갈수록 점점 바빠졌다.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많아졌다. 집에 도착하면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드는 날도 생겼다. 이틀 모두 매출이 오르자 반색이 된 딸은 내가 손님을 몰고 다닌다며 고마워했다. 




어느 일요일. 그날도 어김없이 오프닝 준비를 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은 여느 일요일과 다르지 않았다. 평화로웠고 사람들도 많이 보이지 않았다. 12시가 되어 오픈 사인을 켜고 가게 문을 열었다. 몰과 연결된 옆문도 열었다.


옆문이 열리자 갑자기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와 순식간에 테이블을 꽉 채운다.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손님들이 아쉬워하며 돌아나간다. 몰 로비에 앉아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다. 나를 비롯해 주방 직원들 모두 순간 얼어붙었다.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테이블을 확보한 손님들은 재료 코너로 몰렸다. 저마다 볼을 하나씩 들고 벽을 따라 긴 줄이 늘어섰다. 쉴 틈 없이 음료 주문을 받고 테이블 세팅을 해 주고 요리되어 나온 음식들을 서빙하다 보니 시스템에 주문 내역을 입력할 시간도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그렇게 음식이 거의 나갈 때쯤이 돼서야 오더 내역을 시스템에 입력하기 시작했다. 재료 코너가 하나둘씩 비워지자 요리하는 직원이 중간중간 빈 재료를 채워주고 그릴로 돌아간다.


한바탕 몰려왔던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위해 또 줄을 선다. 줄을 선 손님들이 계산을 채 끝마치기도 전 2 라운드가 시작됐다. 테이블은 또다시 꽉 찼고 면이며 고기, 채소, 소스들을 충분히 채워놓을 시간이 없이 또다시 손님들을 상대한다. 앉을자리가 없어 테이블을 치워달라는 손님의 요청부터 급하게 해결한다. 주방에도 폭탄이 떨어졌다. 예상치 못하게 몰려오는 손님들로 인해 준비했던 재료가 이 나기 시작하자 요리를 하면서 동시에 재료 준비에 정신이 없다. 준비해 둔 볼이며 음식이 나가는 접시, 컵, 포크, 스푼 등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점심 장사가 끝나나 싶었는데 곧바로 3 라운드다.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건가. 이제 점점 정리가 안 되는 상황이 오기 시작했다. 식기 수거통마다 빈 그릇들이 탑처럼 쌓여 주방에 둘러싸여 있고 우리 모두 지치기 시작한다. 면을 채워달라고 하는 손님, 고기를 채워달라고 하는 손님, 소스가 떨어졌다고 알려오는 손님.. 식재료 코너 주변으로 떨어져 있는 재료들을 치우는 것은 이미 2 라운드에서 포기했다. 잠깐이라도 틈이 생기면 재료 채우기에 바쁘다. 손님들이 재료를 담을 볼만 겨우 설거지를 해서 내어 주고 식사는 포장 용기에, 포크와 스푼도 일회용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컵이 없어서 물과 차가 나가지 못하니 손님들은 고맙게도 이해해 주고 음료수와 맥주를 시켜 먹는다.


이러다가 우리 모두 쓰러질 것 같았다. 결국 사모님에게 전화를 해서 가게 상황을 알렸다. 성당에 갔다가 지인들과 모임을 하고 있던 사모님은 CCTV로 상황을 확인하고 곧 가게로 오겠다고 한다. 홀뿐만 아니라 주방 설거지며 재료 준비가 하나도 안되고 있으니 사장님도 꼭 같이 오시라고 당부를 해둔다.


4 라운드다. 이제 좀 괜찮아지겠지 했지만 끊임없이 손님이 들어온다. 이제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 재료 준비, 요리, 설거지, 홀 정리 모두 패닉 상태에 가까워졌다. 4시가 어가는데 우리 모두 점심도 먹지 못하고 있다. 재료 코너며 재료를 준비해 놓은 냉장고, 고기, 볼, 접시, 컵, 수저통 모두 텅텅 비어있다. 말 그대로 올 클린이다.


빨리 온다던 사장님과 사모님은 거의 2시간이 지나 가게에 도착했다. 상상 이상의 가게 모습을 본 사장님은 곧바로 줄지어 늘어서 있던 설거지통을 들어 나르고 디쉬워셔를 돌리기 시작한다. 매출을 확인한 사모님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우리가 어찌 이 상황을 핸들 했는지 영웅담부터 듣고 싶어 한다. 


사상 최고의 매출에 신이 난 사모님은 웬일로 계산대를 나에게 맡기고 재료 코너에 널브러져 쌓여있는 흘린 재료들을 치우기 시작한다. 계산을 마치고 나가는 손님의 테이블도 정리한다. 그리고 주방 직원들에게 재료 준비를 서두르라고 한다.


"저희 아직 점심도 못 먹었어요."

"그래? 아이고 이런.. 밥부터 먹어야지 그럼."

"저는 곧 퇴근할 시간인데 포장해서 갈게요."

"블리야도 못 먹었어?"

"네."

"그래그래. 포장해서 갖고 가. 수고했어~~"


포장 용기에 담긴 밥을 봉지에 담아 달랑달랑 들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발바닥이 땅에서 떨어지지가 않는다. 밥 냄새가 솔솔 풍기는 봉지를 무릎에 놓아둔 채 버스에서 스르르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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