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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풍국 블리야 Apr 05. 2024

동시통역사 라니

꿈을 이루어 가는 사람은 눈부시다

캐나다에 온 지 얼마 안 돼 컬리지에서 만난, 나와 나이 차이가 제법 나던 '라니'라는 아이가 있다. 비즈니스 과정을 공부했던 내가 교차수강으로 통역과 수업을 들으면서 라니와 가까워졌다. 라니는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속이 깊었다. 한국에서 온 같은 또래 아이들과 다르게 해야 할 일에 책임감이 크고 철부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루하지도 않았다.


라니는 팀홀튼의 칠리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내가 칠리를 좋아하게 된 건 라니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늘 한국 음식이 그립지만 매번 먹을 수 없던 우리는 한국 음식에 대한 갈증을 칠리로 해소했다. 같이 칠리를 먹을 때면 '아... 맛있어~' 를 연발하며 신나 했다. 어느 날 라니는 직접 만들었다며 칠리 한 통을 품에 안고 우리 집으로 왔다.



'어떻게 칠리를 직접 만들 생각을 했지?'


신기하면서도 좋아하는 것에 열정을 쏟는 라니가 참 예뻤다. 당시 고모의 지인이었던 분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있던 라니는 종종 내가 살고 있는 스튜디오에 와서 밥도 먹고 과제도 하고 더러 잠을 자고 가기도 했다. 한 번씩 외박(?)을 하는 날이면 우리는 큰 맘을 먹고 데이비 스트릿 Davie Street 에 있는 포차에 가곤 했다.


한국인이 운영하던 그 포차는 안주들이 정말 맛있었다. 특히 파채 가득 넣어 명태포와 함께 무쳐주는 골뱅이와 쫀득쫀득 구워진 삼겹살을 넣고 김치와 볶아주는 두부김치는 입에 착착 붙는.. 돌아서면 그리운 맛이었다. 매운맛에 목말라하던 나를 '캡사이신' 이라는 신세계로 이끌어 준 것도 이곳이다.


한잔 두잔 맥주를 마실 때면 우리는 과거를 나누고 미래를 고민했다. 법대를 갓 졸업하고 캐나다에 온 스물세살의 라니는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집안의 장남보다 책임감이 더 강해 부모님에게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다고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컨벤션기획사로 일하는 동안 수많은 국제행사를 치렀던 나는 라니에게 '국제회의 동시통역사' 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어떤 과정을 거쳐야 국제회의 동시통역사가 될 수 있는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그리고 수입은 어느 정도인지. 라니는 내가 해 주는 이야기들을 꼰대의 쓸데없는 잔소리나 자랑질로 생각하지 않았다.


라니는 차분한 톤으로 한국인 엑센트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영어를 구사했다. 힘을 많이 들이지 않고 너무 굴리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 그 아이의 발음이 나는 참 좋았다. 그렇게 라니는 국제회의 동시통역사의 꿈을 키워갔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 라니는 짐을 모두 정리해 우리 집으로 왔다. 캐나다에서의 마지막 며칠을 나와 보내며 한바탕 웃기도 하고 서운해하기도 하며 이곳에서의 흔적들을 정리했다.


라니가 가던 날. 공항에서 체크인을 마치고 아래층에 있는 팀홀튼에 내려갔다. 우리가 함께 하는 마지막 칠리다. 작은 걸로는 성이 차지 않아 큰걸 시켜놓고 점점 사라지는 칠리를 보며 너무 아쉬워하던 라니는 칠리가 너무 그리울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그렇게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꿈을 설득시키고자 한 라니는 토익 950점을 넘으면 지원을 해주시겠다는 부모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지독히 공부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독함은 결실을 이뤄냈다. 첫 도전을 하던 해 한국외대와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시험이 같은 날로 겹치면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던 라니는 실패의 고배를 마셨다. 외교관이나 주재원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자라온 아이들이 숱한 그 경쟁에서 밀렸지만 좌절 대신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채찍을 빼 들었다. 그리고 다음 해 당당히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에 입학했다.


너무나 기뻤던 대학원 합격 소식을 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엄마가 암 진단을 받았다고 알려왔다. 항암 치료가 있는 날이면 엄마를 모시고 병원을 왔다 갔다 하던 라니는 휴학을 결정하고 엄마가 계시는 지방으로 내려갔다. 엄마를 간호하는 동안 자신의 꿈이 지연되는 것에 대해 불평 한번 하지 않았다. 치료 경과를 알려주고 일상을 전해 왔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 날 덤덤히 엄마를 수목장으로 보내드렸다고 했다. 걱정이 되어 전화를 했다. 괜찮다고 한다. 엄마가 잘 이겨내셨으면 좋았겠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엄마 옆에 붙어서 함께 한 시간들이 있어서 엄마를 편하게 보내줄 수 있다고 한다. 눈물이 났다.



엄마의 장례가 끝나고 마음을 곧 추스른 라니는 서울로 돌아갔다. 학교에 복학해 그동안 손을 놨던 공부에 다시 파고들었다.


성적이 잘 안 나오면 기가 죽어 

"언니~ 저 이번에 00과목 00점밖에 못 받았어요~"


잘 나올 때는 또 신이 나서

"언니~ 저 이번에 00과목 1등 했어요~"


모든 희로애락을 공유해 주던 라니는 어렵기로 악명 높은 졸업시험을 단번에 통과하고 졸업생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사모를 쓰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보니 꿋꿋이 여기까지 와준 그 아이가 너무 고맙고 대견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일이 쉽게 구해지지 않자 졸업도 하기 전에 이미 일을 구한 친구들이 많이 있다며 불안해했다.


"아직 너에게 '맞는' 일이 안 왔을 뿐이야. 남들보다 어려운 조건에서 대학원에 들어가고 졸업도 했잖아. 좀 늦게 오는 것뿐이야. 너를 위한 기회가 곧 올 거야.."


프리랜서 번역일을 하며 흔들리지 않고 인내하던 라니는 이후 계약직이지만 정부기관에서 에디터로 일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이날은 결국 왔다. 통역부스에 앉아 집중하고 앉아있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보는데 '얼마나 많은 감정이 교차했을까', '얼마나 엄마 생각이 났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또 눈물이 났다. 첫 통역을 마친 후 지하철을 타고 63빌딩이 보이는 한강을 지나며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고 했다. 그 긴 과정을 알고 있기에 꿈을 이룬 통역부스 속 라니의 모습이 눈이 부셨다.


라니가 정부기관에서 한 일은 코로나 초기 한국과 미국 간 진행된 코로나 백신 '모더나' 공급 협상의 전 과정이었다.





*<스폰서가 필요해> 매거진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을 경험합니다. 좋은 일로 기쁜 순간을 맞기도 하지만 가끔은 사는 게 벅차기도 합니다. 나의 행복을 함께 기뻐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슬픔을 어루만져 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혼자서 잘 헤쳐나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 꿈을, 내 결정을, 내 변화를, 내 마음을, 내 불안을, 내 시작을, 내 끝을 지지해 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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