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선정되는 밴쿠버. 2023년 순위에서 밴쿠버는 5위에 올랐다. 인근에 산이 있고 도심 속 공원을 쉽게 볼 수 있으며 강과 바다를 끼고 있어 차를 타고 멀리 나가지 않아도 등산, 산책, 해수욕이 가능하다. 캐나다 내에서도 온화한 기후를 자랑하는 밴쿠버는 관광객도 많이 오지만 거주지로도 인기가 높은 곳이다.
다운타운을 거닐다 보면 뜻하지 않게 할리우드 스타를 볼 수도 있는 곳이 밴쿠버다. 다운타운뿐만 아니라 광역밴쿠버 전역에서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가 촬영되고 한 번씩 촬영현장을 마주치기도 한다. 놀스밴쿠버에서 촬영한 파친코를 비롯해 트와일라잇, 크리미널 마인드, 데드풀, 굿닥터, 뱀파이어 다이어리, 타이타닉, 프리즌 브레이크 등 수많은 영화가 이곳 밴쿠버에서 탄생했다. 라이언 레이놀즈, 마이클 부블레, 브라이언 아담스가 밴쿠버 태생이고, 놀스 밴쿠버에 있는 유명한 허니도넛을 먹기 위해 헬기를 타고 미국에서 오는 스타들도 있다. 수많은 스타들이 잠시 또는 휴가를 보내기 위해 밴쿠버를 찾는다.
나 역시 밴쿠버가 주는 배너핏을 톡톡히 누리며 이곳에 살고 있다. 이곳에 온 후 번아웃 증상이 사라진 게 가장 큰 혜택이고 추위를 많이 타는 내게 한국처럼 춥지 않은 이곳의 겨울은 추워서 움직이기 싫은 날, 추워서 나가기 싫은 날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출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의 미소와 인사는 나를 웃게 하고, 밤새 굳게 잠겨있던 내 말문을 열게 하며, 오랫동안 야행성으로 살아온 무기력한 나의 아침에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보이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 한국에서처럼 꾸미지 않아도 되고 심지어 출근할 때 무릎이 튀어나온 츄리닝을 입든, 엉덩이가 꽉 끼는 레깅스를 입든, 슬리퍼를 신든, 쪼리를 신든, 화장을 하든 안 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관과 화려함을 갖추고 실용성까지 겸한 밴쿠버에도 이면이 있다. 부모에게 아픈 손가락의 자녀가 있고 어느 사회나 명암이 있는 것처럼 밴쿠버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 아픈 면이 있다.
한국에서 처음 차를 샀을 때 여성 운전자들을 겨냥해 차에서 일어나는 범죄 뉴스가 연이어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차에 오르면 곧바로 문부터 잠그는 습관이 있다. 어쩌다 옆자리나 뒷자리에 동승자가 있을 때도 모두 차에 오르면 바로 문을 잠근다. 처음엔 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이 이제는 몸에 배어 무의식적으로 차 문을 잠근다.
몇 년 전 점심시간을 이용해 사무실 근처에 있는 달라 스토어(한국의 다이소)에 갔을 때다.잠깐의 쇼핑을 마친 후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해차로 돌아왔고 타자마자 어김없이 내 습관은 문을 잠겄다. 내 손가락이 잠금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순식간에 누군가가 운전석 쪽에 나타났고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0.01초도 안 되는 찰나였다. 차에 탈 때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는데 어디에 있다 튀어나왔는지 모를 그 남자는 차 문을 계속 잡아당기고 유리창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놀라서 입이 자동으로 벌어지고 커진 눈동자는 바르르 떨고 있는데 이 남자는 차 앞으로 이동해 두 팔을 벌려 보닛을 붙잡고 소리를 지른다.
"Give me money! Give me some money!"
나를 노려보는 그 공포스러운 눈과 괴성을 거둔 건 한참 후였다. 미동도 하지 못하는 나에게서 돈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안 듯 한참만에 보닛에서 손을 뗀 그 남자는 유유히 사라졌고 나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지만 심장은 폭격을 맞은 듯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딱 이 모습이었다. 출처 X @kevinvdahlgren
수많은 관광객들이 밴쿠버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는 곳,랍슨 스트릿(Robson Street).다운타운의 중심인 랍슨과 버라드 스트릿(Burrard Street) 사거리에는 심한 눈비가 오지 않는 한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저씨가 있다. 굽은 상체를 노출한 채 마른 몸을 드러내고 앉아있는 그 아저씨는 대충 뜯어낸 종이상자에 적은 인사말을 바닥에 펼쳐두고 빈 커피잔을 옆에 놔둔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스산하게 불면 아저씨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오가는 사람을 애절한 눈빛으로올려다본다. 늘 그 자리를 지키는 걸 아는 일부 사람들은 출근길에 사과나 바나나, 빵을 건네기도 하고 조용히 커피잔에 돈을 넣어주기도 한다.
그 아저씨에게도 퇴근시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집 근처 편의점에 갔다 먹을거리를 사기 위해 온 그 아저씨와 마주쳤다. 그때 아저씨는 등을 꼿꼿이 편채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한쪽 옆구리에는 인사말이 적힌 종이상자가 끼워져 있었다. 종일 등을 굽힌 채상의를 벗고 있는 건 직업정신이라고 해야 할까.
다운타운 어디를 가나 홈리스(homeless, 노숙자)는 쉽게 볼 수 있다. 인도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누워있기도 하고 추운 겨울이 오면 공조 환기구가 있는 곳에서 침낭을 펴고 잠을 자기도 한다. 열기가 빠져나오는 곳에서 조금이라도 추위를 피해 보는 거다. 갖고 있는 재산이라고는 쇼핑카트를 한가득 채운 옷가지와 자잘한 물건들뿐인데 그 카트를 바람막이 삼아 웅크리고 잠든 사람들. 반려견과 꼭 붙어 체온을 나누는 사람들. 바람이 덜 닿는 막힌 건물 사이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다운타운에서 개스타운(Gastown)을 지나 차이나타운(China Town) 쪽으로 내려가면 이스트 헤이스팅스(East Hastings)라 불리는 오래된 유산들이 존재하는 거리가 있다. 몇 년 전에 타계한 중국계 캐네디언 작가 웨이슨 초이(Wayson Choy)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이민자들의 삶과 애환을 담아 쓴 작품 '제이드 피오니(The Jade Peony)'의 배경이 바로 이곳이다.
처음 밴쿠버에 왔을 때 이곳을 지나며 무척이나 놀라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젊은 사람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여자든 남자든, 약에 취해 하나같이 비틀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국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밴쿠버 다운타운 한편에 이런 암울한 이면이 있다는 건 충격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집을 잃은 사람들은 점점 더 몰려들었고 지금 이곳은 홈리스 텐트촌이 되어버렸다. 매년 밴쿠버시와 비씨주는 이곳을 바꾸기 위해 머리를 맞대보지만 갈 곳 없는 사람들을 어디로 내몰아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는다.
밴쿠버의 홈리스는 파악된 숫자만 5천 명에 달한다. 코로나가 터진 2020년부터 2023년까지 32%가 증가했다.그나마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반지하 단칸방이라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형편이 낫다. 끝없이 오르는 물가에 방하나짜리 원배드룸 월세가 3천 불에 육박하는 밴쿠버에서 이 사람들이 회생의 희망을 갖기란 어렵다. 다달이 받는 지원금은 술, 담배, 약값으로 대부분 들어간다. 거리에서 생활하다 보니 수많은 범죄에 노출되고 그 과정에서 대부분은 신분증과 은행 카드를 잃어버린다.결국 구직도 은행 거래도 안 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내 본업은 저소득층과 장애인의 주정부 소득지원 자격요건을 판단해 승인을 하고 예산을 집행하는 일로 일선에 나서는 포지션은 아니다. 하지만 클라이언트 서비스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휴가를 가거나 아파서 출근을 못하는 상황이 생겨 직원이 모자라면 가끔 프런트 업무를 하기도 한다. 신원 확인을 위해 신분증을 보다 보면 사진 속 그 예쁘고 해맑은 미소, 잘생기고 똘똘한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홈리스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마주한다.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말을 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뇌와 혀의 반응이 따라주지 않는 모습을 본다. 말을 하는 중간에 선채로 잠에 빠지기도 한다. 의식을 붙들어주기 위해 말을 계속 시켜보지만 눈빛도, 표정도, 얼굴색도, 이미 신분증 사진 속 그 사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