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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주아빠 Dec 29. 2018

한우와 육회

네 입과 배가 먼저다

짤막한 에피소드.


모처럼 주말을 맞아 가까운 근교로 나들이를 나갔다. 어딜 갈까 고민하다가, 인스타그램에 친구가 올린 사진을 보고 경기도 이천시에 있는 '시몬스 테라스'라는 곳으로 출발했다. 시몬스 침대 박물관 같은 곳인데, 사진으로 보니 커피 한 잔 하고 돌아오기 딱 좋아보였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라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재주 낮잠 깨기를 기다리다보니 밥 때를 놓치게 되었다. 늦은 대로 배를 먼저 채우고 목적지를 다시 둘러보기로 했다.


시몬스 갤러리 바로 옆에는 한우를 팩으로 사다가 바로 구워 먹을 수 있는 농협한우직판장이 있었다. 간만에 나들이인 만큼 채끝살을 두툼하게 한 팩 샀다. 원기회복이 꼭 필요한 아내와 요즘 (걱정될 정도로) 엄청나게 먹는 재주를 위해 열심히 구웠다.


꽤 크게 자른 고기 넉 점을 잘게 잘라서 재주에게 줬는데, 기상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고기와 밥을 좀 먹다가 바닥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입맛이 없나? 소고기 별로 안 좋아하나? 다행히 손님이 없는 시간대라 먹으며 쫓아다니며 나름 편하게 밥을 먹이고 먹었다. 나와 아내도 배가 고파 재주 몫인 넉 점을 제외한 모든 고기를 다 비우고, 냉면과 육회비빔밥을 추가로 시켰다.


한참 뛰놀던 재주가 자리로 돌아와 남은 제 몫의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순삭. 잠 깨고 이제야 몸이 좀 풀렸나보다. 그리고 상을 두드리며 '밥', '맘마'를 외쳤다. 소고기 좀 남겨놓을걸... '오늘은 점심 대충 건너뛰고 이따 저녁 많이 먹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 미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얘는 소고기 별로 안 좋아하나? 하는 건 배고픈 나의 착각이었다. 소고기 엄청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다.



잠시 후 냉면과 육회비빔밥이 도착했고, 아저씨가 불을 빼러 왔다. 불 빼는 아저씨 손을 멈추고, 비빔밥 위에 놓인 가느다란 육회를 한 점씩 덜어내어 불판에 굽기 시작했다. "아 이거 다 구워주고 싶다. 나는 그냥 새싹비빔밥으로 먹을래." 내 말에 아내가 빵 터졌다. 평소 남편이 식탐을 좀 부리는 걸 알기에, 냉면이랑 육회비빔밥 더 먹자 할 때도 '뭘 두 개나 시키나'하는 생각으로 버튼을 눌렀을 텐데, 이 사람이 육회를 내어 굽다니!


어쨌건 육회를 불판에 올린 건 나름 창의적인 임기응변이었다. 애비 마음만으로 만 낼 수 있는 뿌듯한 선택. 이젠 내 마음이 그렇다. 다행히 재주도 모자란 배를 채웠다. 이 날 밥 먹고 둘러본 시몬스 테라스도 참 좋았는데, 기억에 남는 건 이 장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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