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한 나의 첫 고립
아부: 남의 비위를 맞추어 알랑거림
밤 12시가 되면 책 읽는 소녀 동상이 살아 움직인다는 곳, 세종대왕 동상 왼손에 펼쳐진 책이 매일 한 장씩 넘겨진다는 소문이 무성한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한다. 하루 종일 종알거리는 선화가 어쩐 일인지 오늘 하루는 말도 안 하고 눈도 안 마주치는 게 조금 미심쩍었지만, 별 말이 없었기에 내가 예민했겠거니 생각하고 만다. 무엇보다 어서 집에 가서 오빠가 빌려 놓은 드래곤볼을 이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내일이면 다시 평소와 다를 바 없을 거다.
그때 저 멀리서 선화를 비롯해 반에서 무리를 지어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이 나를 부르며 뛰어온다. 같이 놀자고 하면 뭐라고 거절해야 하지 내심 곤란해하고 있던 참에, 도끼눈을 한 선화가 나에게 쏘아대기 시작한다.
"야, 너가 현정이한테 내가 아부 떤다고 말했다면서! 진짜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내가 아부 떠는 거 본 적 있어? 너가 뭔데 걔한테 내가 아부를 떨었다느니 그딴 말을 해?"
"너가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걔랑 친하지도 않고, 아부 뜻이 뭔지도 몰라..!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늘 꾸준히 작았던 나를 제외한 내 친구들은 모두 키가 컸기에, 늘 교실 뒤편에 앉았다. 선화는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기도 했고 길 건너편 다세대 주택에서 운영하는 공부방도 같이 다녔기에 4학년 때 다시 같은 반이 되었을 때 꽤나 기뻤던 것 같다. 선화를 필두로 뒤쪽에 앉아있는 키 큰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고, 그들은 키가 작은 나를 제법 귀여워해줬다. 그랬던 애들이 이제는 쭉 찢어진 눈으로, 괘씸하다는 듯 팔짱을 끼며 나를 에워싸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선화가 어디서 얄망궂게 아부를 떨었었는지 본 적도 없고, 보지도 않은 행동을 굳이 꾸며내어 옮긴 적도 없다. 알랑거림이 도대체 왜 문제가 되는지 조차 납득할 수 없었다. 거듭 아니라고 항변을 해보아도 나는 감히 친구 뒷담을 한 배신자가 되었고, 뭐가 되었든 일단 내 앞에 답답하게 막힌 길쭉한 친구들의 장벽을 거둬내고 어서 집으로 가고 싶었다. 오빠가 학원에서 돌아오기 전에 드래곤볼을 마저 읽어야 했고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키만 컸지 얼기설기 서 있는 틈을 비집고 뛰어보았지만, 꺽다리들 앞에서는 잰걸음에 불과했다. 그들은 끝내 집 앞까지 따라오며 날 향해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했고, 앞으로 가만 두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두고 갔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왜 아부의 뜻을 몰랐을까. 친하지도 않은 현정이는 왜 선화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오공과 크리링이 아무리 투닥거려도 결국 서로를 가장 아끼는 관계이듯, 선화와 나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무리 혼자 비적거리며 생각해 보아도 내일이 그려지지가 않는다.
빨리 안 오면 먼저 갈 거라는 오빠의 여린 으름장이 선뜻 떨어지지 않는 발을 간신히 내딛게 한다. 학교 정문까지 펼쳐진 오르막길이 유난히 가파르고 높다랗다. 등교하는 길에 마주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인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새 교실 앞에 다다랐다. 떨리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교실문을 열어보지만 한 차례 장마를 겪어내고 난 뒤 팽창한 문은 나무 문틀에 꽉 끼어 끼긱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멈췄다를 반복하더니 이내 쿵 소리와 함께 열린다. 의도치 않은 요란한 등장에 반 아이들의 시선이 쏠렸고, 피하고 싶었던 무리의 조소와 멸시가 어린 표정을 마주한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내가 먼저 말을 걸어도 선화의 눈치만 볼 뿐, 가시 돋친 시선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방어막은 무감한 척하는 뻔뻔함뿐이었다.
"나는 괜찮다. 아무 소리도 나에게 닿지 않고, 아무것도 어른거리지 않아. 나는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턱을 치켜올리고, 허리를 곧추 세우고, 눈을 할 수 있는 한 동그랗게 뜨고 다녔다. 어두운 고립에서 떨고 있는 모습을 감추려 있는 힘껏 몸을 부풀려 보았지만 되려 나의 두려움이 더 도드라져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왜 울지 않았을까. 모래 바람이 이는 운동장 한편에 세어져, '아부'가 내 삶에 싹을 틔운 그날 이후로 4반에서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더 친하다며 투닥거리 한 애정도 언제든 자취를 감출 수 있고, 웃음이 낭창낭창 퍼지는 다정의 공간에 인형의 집을 지어도 언제든 외면과 고립의 세계에 툭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알랑거리는 우정에 휘청거린 마음이, 그저 견뎌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아이가 애잔할 뿐이다.
그 이후로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 전에도 내뱉은 적 없겠지만. ‘아부’에는 그 날의 기억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기에, 내 안에서 영영 갇혀있어야 한다. 다른 이에게 그 단어에 어린 서걱한 감각을 전해 주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