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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인 이세린 Nov 24. 2021

04. 패트와 매트

제발 집에 좀 가






   우리 당구장은 젊은 친구들 보기가 정말 하늘에 별따기긴 하지만, 내가 맨날 아재들 얘기만 쓴다 해서 여기가 뭐 동네 노인회관이라던가 그런 건 결코 아니다. 비율로 따지자면 큰 아버지뻘의 할재들이 압도적으로 많긴 한데, 그래도 아주 가끔은 젊은 친구들이 당구장을 찾아주기도 한다. 아주 가끔. 작년 겨울, 낮의 당구장을 하이텐션으로 가득 채웠던 게 나름 젊은 축에 속하는 태상과 규환이었다.


      넌 이름이 뭐야? 난 규환이야! 몇 년생이야? 89야? 그럼 우리 친구네!

      아, 89년생이세요?

      아니, 난 88인데?

      오빤데?

      한 살 차이면 우리 다 친구지 뭐! 반말해 반말!


   술에 젖은 눈으로 우리 모두 다 칭긔 칭긔! 하는데, 놀랍게도 겨울의 짧은 해가 아직 중천에 떠있다.


      친구분 완전 취한 거 같은데?

      응! 나 어젯밤 열 시부터 마셨어! 지금 열일곱 시간째 술 마시는 중이야!


   난 조금이나마 정신이 말짱해 보이는 태상에게 물어본 거였지만, 규환이 신나게 대답한다. 이 친화력 뭐지. 역시 이 동네엔 이상한 사람이 정말 많은 거 같아. 그래. 나도 술 마시면 한없이 신나는 사람인데 너도 그렇구나. 그렇다면 너의 하이텐션에 맞춰줄게.


      와, 열일곱 시간? 미친 거 아니야? 진짜 대박이다, 너!


   그래서 이날만 규환과 친구가 됐다. 아 물론 다음에 봤을 땐 존대를 했고. 세린아! 우리 친구 먹기로 했잖아 왜 존댓말 해? 아, 기억하시네요. 낯가림이 심한 나는 지금까지도 꼬박꼬박 연장자 우대를 하는 중이다. 그날의 우당탕탕 유쾌한 소음은 저녁이 돼서야 잦아들었고, 덕분에 오픈 청소도 못하고 혼이 쏙 빠진 나는 이들의 별명을 이렇게 붙였다. 할 일이 태상인데 아비규환.





   모자도 꼭 그런 걸 쓰고, 둘이 세트로 붙어 다니는 게 패트와 매트 같다. 김밥에 단무지거나. 언제부터 붙어다닌건진 잘 모르겠다. 아마 꽤 오래전부터 붙어 다녔을 거다. 볼 때마다 젊음이 좋고 친구가 좋구나, 하고 부러운 마음이 인다. 타국에서 의지할 친구가 있다는 것. 젊은 나이에 함께 사업을 이끌어 갈 청춘이 곁에 있다는 것. 지금은 동네 골목에서 을지로 감성의 나름 힙한 포차를 하고 있으며, 얘길 들어보면 꽤나 사랑꾼인 것 같긴 한데 퇴근하고 집에 갈 생각은 안 한다. 요새 우리 사장님도 그러던 데, 이거 유행인가?


       야 세린아. 얘 퇴근했는데 이 시간까지 당구치고 있다고 여자 친구가 집을 나갔대. 이거 어떻게 생각해?

       와. 근데도 집에 안 가고 여기서 당구를 치고 있네? 증말 대단하다.


   아니 뭐, 당구가 나쁜 건 아니지. 건전한 스포츠고, 어디 가서 헛짓거리 하는 거보단 낫잖아. 근데 어느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손님은 왜 나에게, 당구장에서 당구 치는 남자는 절대 만나지 말라고 했을까. 왤까.






   패트와 매트는 아직 젊어서, 가끔은 아침 7시까지 당구를 치는 열정을 가졌다. 혹시 하루에 당구를 4시간 이상 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게 아닐까? 아니면 엉덩이에 뿔이 나거나. 그래. 역시 젊은 게 좋긴 좋은가부다. 젊은 건 좋지만 내가 퇴근을 못하는 건 싫다. 제발 집에 좀 가. 언제부턴가 사장님이 패트와 매트에게 당구장 셔터 열쇠를 건네주기 시작했다. 알아서들 치고 돈 놓고 문 잠그고 가, 라며 쿨하게 퇴근한다. 겁나 멋있어. 나도 담에 저 멘트 써먹어야지. 오늘도 야간 벌을 서는 불쌍한 나에게 패트가 올라오면서 묻는다.



      세린아, 너 오늘 아침 7시까지 일하는 날인가?

      엥. 무슨 소리예요. 오늘 오빠들이 7시에 마감하고 가는 날 아니에요?






   그래. 당구장 열쇠를 건네주긴 개뿔. 아비규환의 포차에 가서 나도 마감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술을 적시다 오자. 오늘도 난 일찍 퇴근하긴 글렀다며 절망했고 결국 아침 여섯 시가 다 되어 퇴근하면서, 언젠간 꼭 복수하리라 마음을 먹는다.






공 헤는 밤, 매주 N요일 연재(하려고 노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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