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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인 이세린 Dec 08. 2021

누나, 사랑이 뭘까?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쓰는 편지






   덜컹. 새벽 1시 58분. 콘크리트 건물이 한 번 크게 움직이더니 이내 찌르르 진동했다. 내 몸도 따라서 크게 한번 덩기덕 춤을 추고는, 닦고 있던 당구공을 손에 쥔 채 눈으로 실내의 네 폭짜리 창과 천장에 달린 할로겐 조명의 흔들림을 쫓는다. 마지막으로 내 시선이 마시고 있던 삼다수 페트병에 멈췄다. 물의 흔들림이 잦아들자, 휴대폰에선 지진 알람 문자가 울렸다. 이바라키 진도 4도. 늦잖아. 이래서 언제 대피하라고.



   어느 날엔 덜컥, 하고 짧고 깊숙이 움직이는가 하면 또 어느 날엔 덜컹덜컹, 하고 둔탁하고도 길게 흔들린다. 뭐가 됐든 아직도 이 섬의 끊임없는 흔들림엔 적응이 되지 않는다. 아 또야, 하고 수도 없이 많은 밤을 잠들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난 오늘 홀로 당구장에 깨어 당구공에 광을 내고 있다. 나야 뭐, 여차하면 당구대 밑으로 기어들어가면 그만이지만, 하필 혼자일 때 어둠보다 무서운 건 천둥번개 거나 지진 같은 천재지변이다. 오늘처럼 혼자 깨어있을 때 지진이 일어나는 날이면, 물 잔의 수면을 관찰하곤 한다. 물결이 미세하게 잦아드는걸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도 잔잔해졌다.





  지진 무서워 ㅠㅠ 괜찮아?


   근데 오늘은 자고 있었을 그에게 카톡이 왔는데 그게 그렇게 안심이 될 수가 없더라. 나도 그의 걱정을 안 한 건 아닌데, 괜히 잠을 깨울까 봐. 지금 이 순간에 날 걱정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상상 이상으로 안심이 됐다. 좋은 순간에도, 맛있는 걸 먹고 있다가도, ‘너 생각이 났어’라는 연락이나 퇴근길 누군가의 정원에 핀 꽃*이 신기하다며 보내주는 사진보다, 지금 난 더 사랑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지도 무서우면서, 잠결에도 날 걱정해주는 그가 너무 보고싶어 졌고 퇴근까지 두 시간이나 남은 현실이 야속하다.






  누나, 사랑이란 게 뭘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백 키로에 육박하는 풍채로 북한 고위층의 아우라를 풍기는 재현이가 묻는다. 얘의 턱 밑과 배꼽 즈음에 쌓여있는 건 사실 덕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질문이 아닐까. 온 몸에 아르키메데스의 궁금증을 덕지덕지 붙이고, 행복이란 게 뭐야? 삶이란 걸 뭘까? 사는 게 뭐야? 누난 뭐라고 생각해? 라며 질문들을 털어낸다.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만 쏙쏙 찾아내서 나에게 던지곤 하는데, 근데 재현아, 난들 알겠니. 이 위기만 잘 넘기면 얘는 또 금세 다른 주제로 넘어갈걸 나는 안다. 어쨌든 사랑이 대체 뭐냐는게 지난달까지의 재현이의 궁금증이었고, 이번 달은 다행히도 인간이 저지르는 죄와 벌, 선과 악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답을 찾지 못한 채로 날이 흐르고 달이 찬다. 사랑? 글쎄, 내가 그걸 알고 있다면 이러고 있을까?



   이 땅의 지진만큼이나 숱한 사랑을 지나왔는데도, 아직도 난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다. 과연 이세린 나부랭이가 죽을 때까지 알 수나 있을까 싶다만, 지금 이 상황에 괜찮냐는 그의 카톡 하나를 받고선, 어머, 이게 사랑이 아닐까 어렴풋이 머릿속을 반짝인다. 사랑이 꽃피는 순간이 참 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천재지변의 순간에 둘째가 생기고, 위기의 상황에서 셋째가 태어나고, 대감집 노비들이 눈이 맞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가? 아 이건 너무 갔나. 삶이 너무 힘들고 빡셀 땐 사랑할 여유조차 없으니 이건 또 아닐 수도 있겠다.



   그래 생각해보면 나는, 매해 여름 한반도에 태풍이 찾아오거나, 겨울의 한파가 엄마의 텃밭을 얼릴 때마다 집에 연락을 넣었다. 섬에 지진이 나거나 확진자 수가 늘어날 때에도 엄마와 언니는 나에게 어김없이 카톡을 보낸다. 괜찮아? 조심해, 하고. 대체로 괜찮았고 대부분 아무 일도 없었지만 날 걱정해주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다. 암, 그렇고말고.






   그래서 재현아. 이게 답이 될는지 모르겠다만,  달도  지난 너의 질문에 답을 하자면, 이런  사랑이 아닐까 했다. 눈을 떼고 있어도 마음의 모든 신경이 이미  짝에 가있는 . 떨어져 있어도  시름도 놓을  없는 . 지금 곁에 없어도 밥은 먹었는지, 슬픈 일은 없었는지, 항상 너의 상황을 염려하는 . 마치  손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처럼* 연결되어 있다 느끼는 .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괜찮아? , 괜찮아. 너는? 하고 걱정하는 .


   지구 상의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그 형태가 엄마가 나에게 주는 사랑의 모습에 가까워지면 그런 게 사랑이 아닐까 했다. 그 고마운 마음을 느끼는 순간이 사랑이 꽃피는 순간이 아닐까 하고.


   이건 내가 이번 달에 찾은 답이고, 다음 달엔 내 마음과 이 사랑의 형태가 또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다. 너의 사랑은 다른 모습을 띠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우리는 앞으로도 흔들리는 땅에서 꽃을 피우고 사랑을 하겠지. 그래, 맞아. 이 누난 여전히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다. 언제쯤에야 외칠 수 있을까? 유레카! 누나, 재현아, 이게 바로 사랑이야! 하고.







* 후에 이 꽃은 란타나로 밝혀졌다. 그래서 오늘의 배경 사진은 이 꽃인걸로. 사진 검색 만세! 신문물 만만세! 검색왕 이세린 만만만세 린세삼창.


*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 / 애니 배로스, 2008 : 줄리엣과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편지 형식의 서간체 소설. 차용한 대목은 줄리엣이 시드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죽은 엘리자베스를 대신해 그녀의 어린 딸인 킷을 입양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어린 킷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대목이다. 줄리엣에겐 ‘신비한 직감이 있어서, 킷이 어디 있는지도 항상 안다. 내 손이 어디 있는지 아는 것처럼’ 말이다. 줄리엣의 편지들을 따라가다 보면,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오늘도 난 헤어질 팔자, 매주 N요일 연재(할까 말까 고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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