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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인 이세린 Nov 22. 2021

상실의 동반자, 사랑

삶은 언제나 모순. 누룽지 후에 햄버거로 해장하는 것만큼이나.






   오후께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빨래를 들여놓고, 뜨끈한 누룽지를 끓여 먹는다. 비가 참 뭣같이 온다며 우산을 쓰기도 안 쓰기도 애매하다고 투덜대면서도 비에 젖은 신주쿠를 살짝 걷는다. 비 오는 날은 밖에 나가는 거 아니랬어. 누가? 그냥 내 지론이야. 비 내리는 건 어디 지붕 밑에 가만히 앉아서 눈으로만 보는 거야. 어제 달린 소주 때문에 내내 숙취에 시달리면서도 보슬비 흩뿌리는 거리를 강아지처럼 좋아하는 널 따라 걷는다. 어쩌면 아침에 네가 끓여준 누룽지에 내 숙취가 조금 나아진 걸 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냥 네가 좋아서 나도 같이 걸었다.


   비가 오길래,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노래를 틀었다. 이런 날의 너튜브 관련 노래는 언제나 슬프고, 밀리가 추천하는 도서는 조금 우울하다. 귀신같은 놈의 망할 알고리즘. 그래서 읽기 시작한 <구의 증명>*인데, 날씨 탓인가, 아니, 숙취 탓인가? 명치 언저리가 저려온다. 너무나도 사랑했던 구가 죽자, 너무나도 슬펐던 담이 구를 먹는다는 이야기. 사는 게 고통이었던 구였기에 죽은 후 마저 화염 속에 놔둘 수도,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 뿌릴 수 없었던 담은, 구를 오롯이 기억하기 위해서 천천히 구의 몸을 먹는다. 잔인한 듯 기괴한 스토리가 이렇게나 애절하면 반칙 아닌가?


   노마도 죽고, 이모도 죽고, 구마저 죽어버렸다. 그래. 오늘은 비가 왔고, 난 우연히 이 책을 열었고, 그래서 소중한 사람이 생각났고 덜컥 겁이 났다. 망할 놈의 내 뇌 알고리즘이 구글보다 더 해. 너가 나보다 일찍 죽거나 내가 너보다 일찍 죽으면, 그럼 남겨진 반 쪽은 어떻게 살지? 나는 너를 잃어버린 후에도 사랑한 순간을 그리며 미소 짓게 될까, 아니면 너무 슬퍼서 광광 울기만 할까. 이런 상상을 정말 나만 하는 거야? 조잘대다가 네 몹쓸 상상 속에서 난 이미 너보다 먼저 죽은 거냐며 혼이 난다.


   그래. 너가 먼저 죽으면 수목장을 할게! 아니 그니까  자꾸 내가 먼저 죽냐고! 가볍게 무시하고 내 할 말을 한다. 아 들어봐.  인생에서 확신할  있는 미래는 언젠간 죽는다는 사실뿐이야.   내가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 구더기 무서워서   담근단 소리 아니야, 오해하지 말어!  안에서 죽음은 결코 부정적이거나  무기력하게 하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오늘을 열심히 살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쓰고, 열심히 사랑할 거야. 그래. 내가 먼저 죽으면 화장을 해서  위에 나무를 심어줘. 너가 말을 걸면, 내가 나뭇잎을 흔들어 대답할게. 언제나 이런 얘길 어려워하는 네가 빙글 웃으며 말한다.  우리  죽어? ㅋㅋㅋㅋ 그래 물론, 내일 죽을 수도 있지만 벽에 똥칠할 때까지 지겹도록 행복하게 살다  수도 있잖아.  너의 상상의 끝에는 항상 우리가 죽는 거야?   혼난  같다. 꺄륵 웃으며 내가 말했다.


  그냥. 건강할 때 미리미리 죽음을 준비하면 좋잖아!





   내 아빠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작별을 고했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날 당황스럽게 만든 건 아빠의 죽음도, 장례식이라 부르기조차 민망스러운 조촐한 의식도 아니었다. 아빠가 어떤 식으로 세상과 이별하고 싶었는지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게 단 한 개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더니, 정말이구나. 한편으론 유골함을 고르는 찰나의 순간에도 장례비용을 걱정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죽고 나서도 다 돈이네, 돈 없으면 맘 편히 죽지도 못하겠다. 자본주의 앞에선 죽음조차 자그마해진다. 그 잔인함에 뼈가 저릿했다.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행적을 거슬러 올라가다 너무 짠해지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통장에 빚뿐인 잔고를 보며, 아빠의 삶의 끝에 남은 건 이것뿐인가 자괴감 비슷한 걸 느꼈다. 수천 단위였을 생명보험이 꼴랑 삼백만 원뿐이 남지 않았다. 대체 을매를 까먹은 거야. 암튼 그때는 마치 그 일곱 자리의 숫자가 찍혀있는 증서 한 장이, 아빠의 삶을 고작 삼백만 원짜리로 평가하는 것 같아서 비참했다. 그러다 가격이 적당한 유골함을 고르던 나를 떠올렸다. 참나. 그 아빠의 그 딸이네. 그래, 이세린. 죽음 앞에서 돈 때문에 찌질해지지 말자. 돈에 쫄지 말고, 어깨 펴고 당당하게 그렇게 살다 가자.



묘비명은 지랄쟁이 여기에 묻히다, 요런 건 어때?


   그때부터 나는 생각했던 거 같다. 살아 있는 동안에, 내가 담길 작은 상자의 색깔 정도는 미리 정해놔야겠다, 하고. 나의 삶의 끝에 송별회를 열어줄 누군가가 골머리를 앓으며 고민하지 않도록. 그래서 나처럼 마음속에 물음이 차올라 슬퍼지지 않도록. 무엇보다, 난 분명 죽어서도 옴마야 세상에 마상에 뭔 노무 유골함을 이런 촌스러운걸 다 골랐댜, 라며 그 사람 영혼까지 탈탈 털어내 혼낼 테니까, 구천을 떠돌면서까지 지랄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이별은 때론 우리에게 많은 걸 남기고 간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기억하면 할수록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끝을 맞이할 것인지가 점점 선명해졌다. 삶은 원래 모순이잖는가. 아빠의 삶이 끝나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상실을 겪은 우리의 삶은 다시 시작되었다. k-장녀인 언니의 마음을 비로소 쪼끔은 이해하게 됐고, 나이를 먹는 엄마가 점점 애틋해진다. 엄마, 천천히 늙어. 엄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갔으면 좋겠어. 언니, 우리 상조보험을 들어노까? 린아, 우리 죽을 때 빚은 남기지 말자. 아니야, 언니 빚이라면 갚아줄 수 있을 거 같아. 서로의 아픔이었던 우리는 서서히 치유되고 있었고, 여전히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어쩌면 아빠가 나에게 남긴 건 한 푼 돈이 아니라, 지구 반대편 자락에 떠있는 달 같은 게 아닐까.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명징하게 존재하는 그런 거. 시간이 지나 밤 때가 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그런 거.





  죽음을 기억하는 것

  죽음을 준비하는 것

  가까이 상실과 마주하는 것

  끝내는 내가 상실되는 것



  참고로 이건 발랄한 내 연애 얘기다. 전혀 1도 우울한 구석이라곤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혹시 느꼈다면 그건 기분 탓이다. 그래. 어차피 언젠가 헤어질 팔자라면, 메멘토 모리*도 나쁘진 않겠다. 아무튼 이 모든 것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자연스레 네가 어려워하는 대화의 종점까지 닿아버렸다. 네 인생의 호시절이라는 지금에서야 너를 만나서일까. 항상 잘 먹고 잘 싸고 잘 웃길래 마냥 유쾌한 사람인 줄만 알았다. 가끔 웃고 자주 우울했던 나에게 너는 동녘의 햇살 같은 사람인데. 그런 네가 한창 우울했을 때가 있었다는 말에 나는 놀랐다.


  정말? 너도 우울한 때가 있었어?

  응. 있었지.


  내가 매년 9월이 되면 기일을 타는 척 가을을 타듯이, 너에겐 11월이 그랬다고 했다. 근데 이젠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안 그럴거 같아. 너의 눈에 담긴 내 모습이 반짝 출렁인다. 오늘은 늦은 밤까지 부슬비가 땅을 적셨고, 때마침 당구장엔 감성 발라드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내 잘못이다. 너무 슬프다며 방금 읽은 책의 줄거리를 너에게 재잘댔기 때문이다. 그도 아니라면, 네가 친구들과 기분 좋게 걸친 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며칠 안 남은 올해의 그날을 머릿속으로 혼자 열심히 되뇌었다. 너의 생일이나 비밀번호 말고도 기억할 게 하나 더 생겼다. 공교롭게도 난 이날 친구들이랑 좋다고 눈누난나 놀러 가느라 네 옆에 못 있어 주는데. 근데도 넌 지금 촉촉한 초코칩 같은 눈을 하고 빙그레 웃으며 행복하다니. 귀엽게시리. 그럼에도 행복하고 그렇기에 더욱 감사한 삶은 역시, 아름다운 모순이다.








* <구의 증명>, 최진영, 2015, 은행나무 : 삶과 죽음, 상실과 애도의 과정을 슬프고도 아름답게 풀어낸 소설. 이 책을 이제야 알았네, 또 나만 몰랐네.

*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의 라틴어. 나는 꽤 긍정적으로 그러니 기쁘게 살다 가련다,라고 해석한다. 자세한 건 초록창 참고.





‘오늘도 난 헤어질 팔자’, 매주 N요일 연재 (할까 말까 고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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