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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인 이세린 Oct 13. 2021

01. 내가 니 팬이다!

삼구 사구 아니고 영구





   수보관에서 9첩 반상 도시락을 시켜먹을까 고민하다, 편의점 3종 샌드위치로 마음을 바꾼다. 어제 우연히 들른 지유에서 득템한 이천 엔짜리 가을 가디건이 마음에 쏙 들어서일까. 이런 날은 일명 설렘 다이어트라고, 하루죙일 속이 울렁거려서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법이다. 건널목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데, 신호대기 중인 트럭에서 빵, 짧은 경적 소리가 울린다. 영구 아저씨다. 마스크 아래로 실실 반가움이 묻어난다. 운전석에 앉아 손하트를 날린다. 와, 내가 지금 뭘 본거지? 저 아저씨 지금, 장꾸 표정인 게 분명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 눈이 마주치는 첫 존재를 어미로 여긴다던가, 아비로 여긴다던가? 인생의 어느 첫 순간에 맞닥뜨리는 사람들이 있다. 곤경에 처한 순간이거나,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순간이거나. 그 존재가 어미 아비는 아닐지라도, 처음 순간만큼은 늘 특별하고 오래 기억된다. 당구장 출근 첫날, 마수걸이를 못해서 조급해하던 순간이라면 더더욱. 오픈 청소를 다 끝내 놓고 ‘자, 이제 뭘 하면 좋지?’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 때 찾아온 마수 손님이 영구 아저씨였다. 아담한 체구에 까맣게 그을린 피부가 어딘지 강단 있어 보인다. 굳이 무언가에 비유하자면, 뜨겁게 열이 오른 번철에 잘 볶은 서리태 같다. 한가로운 낮의 평온을 깨고 서리태가, 아 아니, 영구 아저씨가 자신의 온갖 tmi로 당구장을 가득 채웠다.




   무조건 용서되는 사람. 뭐 예를 들면, 초면에 우리 아버지에게 아이고 형님, 형님! 하던 고등학교 때 윤리 선생님, 내 이름의 마지막 한 자로만 감히 날 불러주던 축구와 아침을 좋아했던 동창. 단지 나라는 이유로 날 예뻐해 주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이상하리만치 뭘 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더 마음 놓고 어리광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여태껏 그런 사람들을 ‘무조건 용서가 되는 사람’이라고 불러왔고, 영구 아저씨도 그들 중 하나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순간, 얼큰하게 취해 당구장 계단을 올라오는 영구 아저씨의 사알짝 풀린 눈을 보고 있자니, 아 아닌거 같다. 내가 한참 잘 못 생각한 거 같은데. 무조건적인 용서는 우리 엄마가 나한테나 하는거다. 타인을 향한 이 말의 무게는 너무 무겁다. ‘이 정도 가지곤 밉지도 않은 사람’. 그래, 오늘부터 이렇게 부르자. 그들에게 내가 밉지 않은 사람인 것처럼, 나도 그들의 편에 선다.




   아재나 할재에 대처하는 법, 뭐 이런 책은 없나? 그들의 짓궂은 농담이나 치근거림, 관심에 때론 어찌 반응해야 될지를 몰라서 그냥 헤실 웃고 만다. 영구 아저씨가 “오빠야가 니 좋아하는 거 알제?” 할 때마다, “알죠 알죠” 이상의 리액션은 나오지 않는다. 뭔가 엄청나게 예쁨을 받고 있는 기분이라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황송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 그래서 꼭 대답을 두 번씩 반복한다. 알죠 알죠, 그쵸 그쵸. 태양광 인형처럼 끄덕끄덕 하면서, 영혼과 마음이 담긴 듯 안 담긴 듯 애매하게. 작은 아버지, 삼촌뻘이면서 자꾸 오빠야란다. 지지 말자. 꼬박꼬박 영구 아저씨라 부르는 중이다. 이런 농담이 누군가에겐 희롱으로 여겨질만큼 불편한 세상을 살고 있지만, 난 그게 밉지 않아서 ‘다 우리네 아부지다’하고 웃어넘긴다. 하긴, 당당하게 ‘내가 마, 세린이 팬이다!’라고 하는 내 1호팬의 뻔뻔함엔 안 웃을 수가 없다.



   아재 항마력을 너그럽게 만든 건, 어쩌면 나에게 부재하는 아버지의 시간 때문이 아닐까. 아버지도 온갖 자재와 타일 자르는 기계가 실린 트럭을 몰았다. 이 동네 공사는 자기만 하는 거 아니냐며 더러워진 작업복을 보며 툴툴대던 아저씨처럼, 우리 아빠 작업 바지와 운동화엔 늘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시멘트인지 실리콘인지 모를 하얀 무언가가 얼룩덜룩 묻어있었다.

   작업을 끝낸 아빠는 약주 한잔 걸친 채 비적비적 어디로 향했을까. 아저씨 말마따나, 할 것도 없는데 당구나 치러 갔을까. 그러다 술을 너무 많이 걸친 탓에 삼천 엔빵 내기 당구를 세 번이라도 지는 날엔, 이런 시-바, 시발롬아 하고 이미 입에 붙어버린 비속어를 찰지게 뱉어냈을까. 다음날 눈을 뜨면 전날 숙취보다 더한 새끼들 걱정에, 공사 먼지 마셔가며 또 하루를 살아 냈을까. 아들내미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 아들 잘 생깄제?’ 하던 아들바보 아저씨. 아빠도 밖에 나가면 똑똑하고 예쁜 두 새끼들을 자랑했을까.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고 모른 체해서, 이젠 알 길이 없는 아버지의 시간을 더듬어본다.




    어쨌든 그날은 당구장의 네 폭짜리 큰 창으로 따가우리만큼 따사로운 가을볕이 쏟아져 들어왔고, 나는 한가했다. 기울어 가는 볕을 쫓아 자리를 옮겨 앉을 만큼 왕왕. 창가의 긴 바 테이블에 노트북을 펼쳐놓고 앉아, 괜히 발가락만 꼼지락거린다. 이내 곧 오오쿠보 도오리를 내려다보다, 오후의 일광욕을 즐기는 고양이의 마음이란 이런 것일까 생각했던 거 같기도 하다. 당구장의 오후는 상상 이상으로 할 게 없고, 어마어마하게 나른한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정신 차려보니 난 아저씨네 쭈글쭈글하고 못생긴 반려견까지 알게 됐는데, 어쨌든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눈이 땡그란 퍼그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영구 아저씨는 퇴근하는 나를 향해 내가  팬이라며 손하트를 날려주신다. 그래서 모처럼 나도 기분이다, 아저씨 특유의 장꾸 표정을 따라 짓곤, 주머니에서 손하트를 꺼내보였다. 저도 아저씨 편이에요, 오늘도 신나는 퇴근길.






공 헤는 밤, 매주 N요일 연재(하려고 노력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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