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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인 이세린 Oct 28. 2021

02. 테스형

아재식 농담은 어딘가 외롭다






   “야, 내가 너희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하나 해줄게!”


   아지트 사장님이 계단을 올라오면서 동년배 친구들 무리를 향해 소리친다. 장정 같은 등치만큼이나 커다란 목청이다. 을매나 재밌는 얘기길래 당구장이 쩌렁쩌렁 울린다. 그 이야기인즉슨, 지인 중 누군가가 암에 걸려서 지금 항암치료를 받고 있단다. 아… 아니, 지인이 투병 중이라는데 이게 과연 ‘늬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긴’가? 싫어하는 사람인가? 쌤통이라는 건가? 뭐야, 소시오패스야? 아, 아니면 혹시 이런건가. 이야! 이 짜식, 너도 드디어 ‘THE 항암’ 행렬에 참여했구나! 꼬리를 무는 온갖 물음을 휘휘 쫓아내고, 당황스러움을 감추며 안 들은 척 딴짓을 해본다. 예순이 훌쩍 넘은 아저씨들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몰라 삐질 진땀을 뺀다.


   퇴근 후 포차에서 혼술을 하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아지트 사장님을 필두로 당구장 단골 아재들이 우르르 몰려와 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혼자 술 먹자니 심심하기도 하고, 가까이 들리기도 했고, 방금까지 나랑 수다 떨던 성형이는 이 시끌벅적한 단체손님들 때문에 갑자기 바빠졌다. 이럴 때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만큼 흥미로운 안주는 없다. 지금 내 오른쪽 귀는 코끼리 귀만큼 커졌다. 엿듣는 거 들키면 안 되니까 눈은 핸드폰 화면에 고정시킨 채 가만히 대화 내용에 집중한다. 대화의 90%가 항암치료받은 이야기, 건강검진 썰이다. 그러다 주거니 받거니 여기 저기 고장난 서로의 육신을 염려한다. 그래, 우리는 이제 그럴 나이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건강 챙겨야 돼. 그럴 나이. 죽음에 가까워지는 나이. 질병과 죽음을 혼연히 입에 올릴 수 있는 나이. 무진장 딥하다. 술자리에서 다솜이와 진로 몇 병을 홀짝이며 인생 한탄을 하거나, 부장님 욕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라이어 게임을 하는 나와는 차원의 깊이가 다르다. 여기 같은 시공간 맞니? 아저씨들의 합석 제안을 쿨하게 거절하길 잘했다.



   그렇게들 건강을 걱정하시면서, 늘 술을 드신다. 저 얘기도 소주 한잔 걸치면서 한 거란 걸 잊지 말길. 우리 동네 아저씨들은 늘 취해서 오시거나, 당구장에 와서 코 끝까지 얼큰해져서 가시거나 둘 중 하나다. 동네 어귀의 대폿집이나 횟집에서 한 잔 걸치고, 오늘도 어김없이 두 잔 더 걸치러 당구장 계단을 오른다. 정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술을 마시는 듯하고, 하루 정도는 빼놓고 이곳 참새 방앗간에 들르신다. 당구장을 나서면 댁에 가시는지 또 한잔 걸치러 가는지, 거까진 잘 모르겠다. 어쨌든 중요한 건, 간혹 아저씨들이 술을 안 먹기라도 하는 날엔 그 풍경이 참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니까. 가끔은 당구를 치러 오는 건지 딱 한 잔 부족했던 맥주 배를 채우러 오는 건지 헷갈릴 때도 있지만, 아무렴 어떤가. 왜, 딱 한잔만! 더 먹고 싶을 때 있지 않나? 좋아하는 벗과 맥주와 당구, 겸사겸사. 인사불성의 만취자는 없고 대판 싸움도 일어나지 않으니, 뭐 내 눈엔 다들 나름 즐거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카운터에 서서 어쩌면 이건 외로움의 표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술에 취해 앞에 앉은 누군가를 향해 주절주절 떠드는 것은, 고독을 표현하는 하나의 몸짓이 아닐까. 내 아버지가 그랬고, 삶의 터전을 이 동네에서 오사카로 옮긴 배 삼촌이 그렇다. 어느 날 가게 회식자리에서 우연히 옆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배 삼촌을 만난 적이 있다. 삼촌은 우리 회식 분위기엔 아랑곳하지 않고,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은 땡초에게 구절한 사연을 털어놓았다. 인생의 넋두리였던가. 하소연이었던가. 그래도 괜찮아, 잘해봐야지. 라고 마무리 짓는 얘기가, 약간은, 나 아직 건재해, 자신에게 되뇌는 말로도, 스스로를 격려하는 말로도 들렸다. 깔깔마녀처럼 깔깔깔 웃으며 농담을 던지던 삼촌의 처음 보는 응달진 모습이었다. 술에 취한 배 삼촌을 문 밖까지 배웅하면서, 그때까지 묵묵히 있던 땡초가 입을 열었다. ‘참, 외로워 보여.’


   배 삼촌이 오사카로 거처를 옮기고부터는 오사카 삼촌, 이라는 별명이 그림자처럼 떼어내 지지 않는 그 외로움만큼이나 더 입에 붙어버렸다. 타향 오브 타향살이의 고독을 이만큼 잘 표현하는 별명은 아마 없을 거라고, 잘 붙인 네이밍 센스에 혼자 뿌듯하다. 오랜만에 도쿄에 올라온 배 삼촌이 맥주 한 캔을 쏘신다길래 넙죽 받아 캔 뚜껑을 타악, 따고선 내가 묻는다. 오사카는 어떠세요? 지낼만하세요? 삼촌도 치익, 캔을 따며 대답한다. 그냥 그렇지 뭐. 이어 짠을 하곤 서둘러 말을 돌린다. 야, 세린이 너는 연애 안 하냐? 좋은 남자 만나서 얼렁 시집가야지. 우리 엄마도 안 하는 또 그 지겨운 잔소리를 하신다. 어휴, 지겨워. 그만하세요. 때 되면 알아서 하긋지! 아 그러냐? 껄껄. 아무튼, 좋은 인생 살라고. 깔깔.




 


   삼촌은 다른 손님이 없을 때면 가끔 카운터에 와서 신청곡을 조른다. 한가로운 당구장에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존재하지 않는 손님의 눈치를 보며, 손님 없으니까 괜찮지? 하고. 음식점에서 일할 땐 손님이 BTS 노래를 틀어 달라고 해도 단호하게 거절했던 나다. 한번 틀어주면 계속 틀어줘야 하니까. 나는 삼겹살을 구워야 하는데, 유튜브만 재생하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근데 당구장은 정말 할 게 없으므로, 소소한 할 일이 생긴 게 오히려 흔쾌하다. 저번엔 왁스의 화장을 고치고를 틀어달라시더니, 오늘은 나훈아의 테스형이다. 야, 세린아, 이 노래 좋지 않냐? 이거 아저씨 십팔번이야. 아, 정말요? 나는 가끔 외로울 때 테스형을 들어. 뭐 그런 건가?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촌스러운 가락을 흥얼거리며, 작년 이맘때 한창 화제가 됐을 때도 찾아보지 않았던 배 삼촌의 십팔번을 초록창에 검색해본다.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걸쭉하게 딥하고 난리다. 사람들은 이 노래에 왜 그렇게 열광했던 거예요? 깔깔 웃으며 죽음에 관한 썰을 태연하게 푸는 ‘그럴 연배’의 배 삼촌이 말문을 연다. 야, 세린아. 아저씨가 말이야, 맨날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셔서 이러다 죽겠다 싶어. 깔깔. 혹시라도 내가 죽으면 마음속으로 안녕히 주무세요 라고 인사 좀 해줘! 그럼 고마울 거 같아. 깔깔깔. 와… 쎄다. 자학과 자조 섞인 농담이라면 나도 어디 가서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이런 얘기를 본인 육십오 돌 귀 빠진 날에 하실 건 뭐람? 딱히 받아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눈썹을 팔자로 하고 쓴웃음을 짓다 곧 입꼬리를 바로 하고 우왕! 생신 축하드려요 짝짝짝짝짝 손뼉을 친다. 여기서 진지해지면 안 된다 이세린. 삼촌이 달아놓은 팔천 엔짜리 외상 전표가 아른거린다. 사장님이 받아놓으랬는데. 아니 뭐 꼭 그것 때문은 아니고. 생일 축하 덕분일까, 박수 쳐줘서 고마워어! 라며 외상값을 내고 가신다.






   내가 뭐라고 그들의 외로움을 함부로 가늠하며 감히 채워줄 수 있으랴. 난 내 아버지의 고독을 외면했고, 맥주 한잔 기울이며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고독에서 몸부림치는 그의 행위가 나에겐 늘 피곤한 술주정이었다. 다시 같은 상황이 온다면, 나는 또 도망치지 않을 자신이 없다. 그치만 내 아버지는 이미 없고, 유튜브로 테스형 재생하는 거, 그거 어려운 일 아니니까. 나의 작은 행동이 위로가 된다면 그걸로 되었다. 이제와 이렇게 효녀 코스프레를 하는 건, 어쩌면 내 속죄의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사는 게 어렵고 세상이 힘들어서 때때로 아버지를 찾았던 것처럼, 삼촌에게 테스형이 그런 존재인 걸까. 육십오 세의 삼촌도 세상이 어렵구나, 나처럼. ‘나이 먹으면 죽어야지’ 만큼 진심이 1도 없는 거짓부렁이 어딨겠나. 조금 더 건강하고 덜 외롭게 좋은 인생을 살고 싶은 거지, 결코 죽고 싶은 건 아니리라. 기어코 오고 마는 내일이 두려울 지라도, 그럼에도 그저 오는 오늘에 고마워하며 살아내기를 마음 깊이 바라며 깔깔, 웃어본다.






공 헤는 밤, 매주 N요일 연재(하려고 노력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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