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들은 대부분 나를 닮아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곧 나와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보며 그렇게 느낀 것보다는, 타인들을 볼 때 그랬다. 그 사람을 알고 싶다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으면 금세 감이 온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은 그 사람과 많이 닮아 있다. 그래서 나는 좋아하는 게 많은 사람을 유독 애정한다. 내게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와 밀접하게 닿아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좋아함’을 관찰해 보면 그 시작점은 다양하다. 친한 친구가 좋아해서, 혹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서 등 남을 통해 취향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고, 그저 이유 없이 마음이 꽂혀버리는 사람도 있다. 나는 한때 후자의 입장에서 전자를 가볍게 여겼다. ‘취향은 스스로 찾는 거지, 어떻게 타인으로부터 빌릴 수 있나’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백화점에서 향수를 고르다
“어떤 게 제 이미지랑 더 잘 어울릴까요?”
라고 묻는 내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취향의 시작에는 누구나 누군가의 시선이 스며 있을 수 있다는 걸.
그제야 다행히, 함부로 말하지 않았던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아는 사람 중에 내 물건에 유난히 관심을 보이는 이가 있었다. 넘어서 생활습관, 내가 했던 말과 행동까지 닮아갔다. 처음에는 즐겁게 공유했지만 점점 피로해졌다. 그래서 조심스레 말했다.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어.”
알겠다고 하던 그녀는 이후로 몰래 같은 물건을 사기 시작했다. 어느 날 우연히 본 신발장과 옷장 속에서 낯익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그때 예쁘길래, 나도 따라 샀어.”
마음이 불편했던 건 사실이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타인의 취향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어쩌면 그녀도 단지 ‘좋아 보였던 것’을 쫓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나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허영에 가까운 마음으로 물건을 고르기도 했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분명하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청순한 모델에게 홀려 산 롱스커트를 몇 번도 입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취향을 갖는 일과 무언가를 쫓는 일은 닮아 보이지만 다르다는 걸 이제는 안다.
한편, 명확한 취향을 지닌 사람들도 있다. 대학 시절의 친구들이 그렇다. 셋이 함께 쇼핑을 가면 그들이 무엇을 좋아할지 단번에 알 수 있다. 내가 추천한 물건에 두 사람의 눈빛이 반짝이고, 그들도 내게 말한다.
“이거 네 거 아니야?”
아니나 다를까, 결국 지갑을 연다. 그 둘은 편안하면서도 세련되고, 귀여움 한 스푼과 자연스러움 한 바가지를 더한 스타일을 좋아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사람들이다. 가끔 거래처 미팅을 마치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나타날 때면 잠시 낯설어진다. 그럴 때 나는 강아지가 냄새로 주인을 찾듯, 핸드폰 배경화면이나 작은 액세서리를 눈으로 좇는다. 그 안에 여전한 그들의 흔적을 확인하면 마음이 놓인다.
나는 강렬한 색을 좋아한다. 얼굴에는 잘 받지 않아 양말이나 머리끈 같은 작은 포인트로 즐긴다. 또 고래를 아주 좋아한다.거대한 고래를 보고 있으면 한 줌의 모래알처럼 작아지는 내 모습이 겸허해진다. 대자연의 신비를 품은 존재라서 더 좋다. 대단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이 든다.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고래를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그냥 좋다. 깊은 바다를 유영하는 모습을 보면 심장이 잠시 멎는 것 같다.
노란색도 좋아한다. 엄마가 좋아하는 색이기도 하다. 우리 집 커튼과 조명은 늘 노란빛을 받는다. 공간이 따뜻해지는 색이라 좋다. 나는 디테일이 살아 있는 것들에 끌린다. 체크무늬가 매끄럽게 이어지는 셔츠, 마감이 완벽한 가방과 신발처럼. 고래를 좋아하는 나를 보고 한 친구가 말했다.
“그렇게 순수하게 좋아하는 게 참 순수해 보여.”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어쩌면 사람과 취향이 닮은 것보다, 무엇을 바라보는 마음의 방식이 그 사람과 더 닮아 있는 건 아닐까. 내가 그것을 좋아하는 이유, 어쩌면 그 이유가 곧 ‘나 자신’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