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경험이 좋은 경험은 아니다

by July

스무 살 초반부터 사회생활을 하며 나는 고통에 무뎌져 단단해졌다고 믿었다. 과거의 고통 덕에 지금의 내가 있고, 지금의 힘든 시기가 지나가면 나는 더 강하고 멋진 사람이 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믿음으로 당시의 시간을 스스로 위로했다. 원래 인생은 그런 거라고.


구조사무실에 들어가 주말도 반납하고 휴일에도 출근했다. 야근은 당연했고, 철야는 매달 반복됐다. 일은 줄지 않았고 몸은 서서히 망가졌다. 업무 스트레스로 한 번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무리하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됐다. 그때까지도 나를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직장인이라면 다 이렇게 사는 줄 알았다. 우리 회사 사람들 모두 같은 속도로 지쳐가고 있었으니, 잘못된 건 나의 체력이나 경험부족이라고 여겼다. 동기 열 명 중 여덟 명이 퇴사하고, 내가 아홉 번째로 회사를 나설 땐 그때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이후의 회사에서도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구조사무실에서 인테리어 디자인 사무실로 옮겼지만, 주어진 일은 끝까지 해내야 한다는 태도는 그대로였다. 급한 일은 늘 내 몫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습관처럼 받아들였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어느 순간, 그 안에서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쓰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쉽게 닳아도 괜찮은 부품처럼.


내가 사회에서 배운 것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대접을 받는 게 아니라 퇴사할 때까지 열심히 결과를 내야 하는 물건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적당히 하기로 했다. 일은 잘해도, 못해도 안된다. 업무에 관련된 내용은 웃으며 넘기기보다는 내용을 짚고 넘어가야 하며, 감정은 최대한 덜어내는 것이 사회로부터 나를 지키는데 유리했다. 그 과정에서 성격은 딱딱해졌고 말투는 단단해졌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도 선을 긋는 법을 익혔다.


사람들은 내게 힘든 회사를 다녀서 단단해졌다고 말했다. 나 역시 그렇게 믿은 적이 있었다. <지니 & 조지아>의 한 장면을 보며, 오래 붙들고 있던 생각이 조금 흔들렸다. 힘들지 않았다면 남은 에너지로 난 더 잘 살고 있지 않았을까. 다치고 아파서 정신을 잃을 만큼 소진해야만 얻을 수 있는 성장은, 내가 원하던 종류의 성장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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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지니 & 조지아> 에서 조지아는 딸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다. 학대와 방황의 시간을 지나온 이야기를 고백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런 일을 겪어서 강해진 게 아니야. 그 일 때문에 기력을 다 써버렸을 뿐이야. 그 일만 없었어도 나는 훨씬 더 강했을 거야.”

그 장면이 오래 남았다.


세상은 자주 모든 경험에는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고난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고. 하지만 모든 경험이 좋은 경험은 아니다. 어떤 일들은 그저 파괴적일 뿐이다. 상처는 때로 사람을 성장시키기보다 멈추게 만든다. 버텨냈다는 사실이 곧 강함의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때로는 그저 살아남은 사람일 뿐이다.


여러 회사를 거친 지금, 나는 그 사실을 조금 더 또렷하게 인정한다. 어떤 경험은 애초에 ‘이겨내야 할 일’이 아니라 ‘겪지 않았어야 할 일’이었다. 그 일로 인해 단단해지지 않아도 괜찮다. 단지 버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모든 경험이 좋은 경험은 아니다. 어떤 경험은 나를 부수고, 그 부서진 조각을 안고 살아가느라 배로 치유의 시간이 걸린다. 그럼에도 내가 여전히 나로 남아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잘 해낸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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