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게 바로 엑셀의 축복
연말정산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망의 학교 회계 결산이 다가왔다. 연말정산을 제대로 끝냈는지 곱씹을 새도 없었다. 마감 직전까지 예산이 부족한지 넘치는지 파악하고, 모든 지출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중 가장 두려웠던 건 역시나 급여 관련 업무였다. 회계 마감 때는 교육공무직원의 생성된 연차와 사용한 연차를 계산해서 연차미사용수당을 지급하고, 1년간 근무하며 쌓인 퇴직금을 계산해서 적립해야 했다. 연차와 퇴직금이라니…. 발령받고 수습을 뗄 때까지 들었던 몇 번의 급여 연수 때마다, 나를 좌절에 빠트렸던 분야였다. 강사님의 말을 듣고 또 들어도, 연수 자료를 보고 또 봐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다. 특히 퇴직금은 다른 나라 말이라도 되는 것만 같았다. 통상임금은 뭐고, 평균임금은 뭐란 말인가.
설상가상 나의 유일한 희망이셨던 계장님(전임자)은 1월, 다른 지역으로 발령받으셨다. 아는 동기도 없는 데다, 인근 학교에 묻고 싶어도 뭘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몰라 전화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역시 믿을 수 있는 건 계장님뿐이었다. 비록 육체는 떠나셨더라도, 하드디스크엔 계장님이 남겨둔 급여자료가 남아있었다. 수없이 많은 자료 중 몇 개의 연차 및 퇴직금 엑셀 서식을 찾아냈다. 최종 저장 날짜가 작년인 자료 위주로 몇 개를 추려내긴 했는데, 문제는 내가 이 분야의 까막눈이라는 거였다. 어떤 게 정확한 자료인지, 이 수식으로 도출된 결괏값이 맞는지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주변에 물어가며 엑셀을 이렇게 저렇게 조합하고, 실장님의 확인까지 거쳐서, 예상본, 수정본, 최종본, 확정본 등의 수많은 자료를 만들어 내며, 어찌어찌 그 해의 퇴직금 적립을 마무리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맨날 업무를 어찌어찌 처리하느냐고. 공무원이 일을 그렇게 해도 되느냐고. 맞다. 사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당연히 제대로 알아보고 정확히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근데 변명 하나만 해보자면, 매뉴얼이 없다. 그나마도 있는 매뉴얼은 죄 원론적인 내용뿐이다. 그렇다면 도제 훈련 제도처럼 선배가 기술을 전수해주느냐. 그것도 아니다. 마치 구전설화처럼 혹은 지역마다 다른 전설처럼, 학교마다 제각각인 업무 분장과 가지각색의 엑셀 서식과 불명확한 관습들이 있을 뿐이다. 이런 실정이니 신규가 업무를 제대로 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럴 때 한 줄기의 희망이 되는 게 바로 직무 연수다.
직무 연수는 같은 직렬 공무원으로 이루어진 내부 강사가 진행한다. 경력이 길다고 되는 건 아니고, 따로 강사양성 과정을 밟아야 한다. 원론적인 매뉴얼보다 훨씬 더 실무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과 동시에 선배들의 스킬과 팁을 얻을 수 있는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런 기회가 매번 있다면 신규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연수가 자주 열리진 않는다. 나만 해도 임용되고 두 달이 지나서야 첫 연수를 받았으니까. 연수 한 번 듣지 못하고 면직하는 신규들도 꽤 있다.
업무를 조금 해보고 들은 첫 연수가 어땠냐면, 최악이었다. 연수의 문제는 아니고, 내 이해도 때문이었다. 업무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마감하기 바빴는데, 전문적인 용어들이 난무하는 연수를 알아들을 수가 있을 리가. 들으면 들을수록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는 생각뿐이었다. 연수가 기회가 된 건 시간이 꽤 지나서였다. 새 학기가 시작하는 3월에 들었던 ‘급여 추수 과정’은 공무원 생활의 변환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강의 자료가 마치 책처럼 세세할 뿐 아니라, 무려 엑셀 서식 모음집을 제공했다. 제대로 된 엑셀만 있어도 업무의 효율과 정확도가 확 높아지는 게 바로 회계다. 검증된 엑셀 서식이라니,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그것의 위엄을 경험할 계기는 곧 찾아왔다.
4월에 기간제 직원의 퇴직이 있었다. 연차미사용수당과 퇴직금을 지급해야 했는데, 적은 금액이 아니다 보니 긴장됐다. 내 구원자였던 계장님이 떠나셨지만, 그래도 나에겐 지난달 받았던 강사님의 엑셀 모음집이 있었다. 그중 퇴직금 산정 엑셀은 총 다섯 개의 시트로 되어 있었는데, 첫 시트에 기본적인 정보를 적으면 자동으로 다른 시트까지 계산되는 신문물이었다. 이런 신세계가 존재했다니. 아무런 버거움 없이 무사히 퇴직금을 지급하고 나니, 행정실 업무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 엑셀 모음집의 진가는 날이 갈수록 빛을 발했다. 육아휴직 후 복직하신 선생님의 복직합산금을 지급해야 할 때나, 호봉이 잘못된 분의 호봉정정 소급을 할 때, 이 엑셀 모음집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다. 이건 혁신이었다. 왜 교육행정 선배의 블로그에서 엑셀만 잘하면 된다고 했는지, 드디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연수를 받으며 친해진 주무관님들과 연수자료와 엑셀 서식을 주고받으며, 작년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여유로운 한 해를 보냈다. 이대로만 한다면 그 어떤 새로운 업무도 두려울 게 없어 보였다. 새로운 업무보다 지나간 업무가 더 두려울 수 있다는 걸, 엑셀이 전지전능한 수단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