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0등보다 못 한 2등
몸으로 하는 건 잘 못 해도, 공부는 꽤 잘하는 편이었다. 가난한 현실에서 벗어날 방법은 공부뿐이라는 그런 거창한 의도는 아니었고, 단순히 인정욕구가 강한 편이어서 그랬다. 집에선 칭찬 들을 일이 별로 없는데, 학교에서는 받아쓰기 100점을 맞거나 시험 성적이 좋으면, 나를 보는 선생님들의 시선부터가 달라졌다. 친구들과 비교하며 나를 특별대우 해주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학교에서 열린 한자 대회에 입상하거나, 독서 골든벨에서 1등을 했을 때의 그 짜릿한 경험들은 더욱 공부에 매진하도록 만들었다. 성적으로 줄을 세우기 시작하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한 번은 한자 과목 점수가 낮아 90점대였던 평균이 80점대로 떨어진 적이 있었다. 어찌나 분통이 터지던지, 한자 시험지를 갈기갈기 찢으면서 2km나 되는 하굣길을 내내 울면서 걸었다. 부모님은 시험 성적 하나에 분노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일하느라 정신없던 아빠의 ‘그러게, 잘하지 그랬어?’라는 무심한 말을 듣고는 더 서러워져서, 그날은 밥도 먹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울기만 했다.
공부에 대한 욕심을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이해받지 못한 건 아니었다.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공부에 욕심이 많았던 작은 언니는 내가 공부에 소질이 있는 걸 알아채고 트레이너를 자처했다. 마주하는 시간이 별로 없고 나를 직접 가르쳐 줄 상황이 안 되었으므로 문제집이나 필기구를 사주는 등의 지원을 해주기도 했고, 무엇보다 성적에 엄격한 관리자가 되어 주었다. 성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그날 하얀 쇠 옷걸이는 제 용도 외의 다른 방법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마 언니는 자신이 끝내 이루지 못했던 공부에 대한 열망을 내게 투영한 게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 모든 상호작용이 어우러져 드디어 중학교 2학년 때, 전교 2등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집으로 가는 시간이 설렜다. 칭찬에 박했던 부모님도 그때만큼은 별다른 첨언 없이 나를 추켜세우기만 했다. 엉덩이를 토닥이고, 뽀뽀하고, 기분이 좋은데 외식이라도 하자며,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이후의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다만 2학기 들어서는 성적이 떨어져 6등을 했고, 나는 내 실력만 믿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 많이 맞았다. 내 성적이 떨어지면 누군가는 오르는 법. 친한 친구 중 한 명의 성적이 급상승했다. 전교 2, 30등 언저리에서 놀던 친구는 그 학기에 10등 안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동네에는 경축이라는 글자가 쓰인 플래카드가 걸렸다. 거기에는 친구의 이름과 등수가 자랑스레 박혀 있었다. 학교 근처 골목에 떡 붙어 있어, 꽤 오랫동안 그 문구를 보며 등하교해야 했다. 처음으로 공부에 대한 상실감을 맛보았다. 친한 친구를 온전히 축하하지 못하는 미운 마음, 플래카드까지 걸어가며 축하해 주는 부모님이 있는 친구에게 질투까지 느끼는 내가 싫었다. 난생처음 이런 사람밖에 못 되는 나를, 이렇게 못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벗어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