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예쁘장하고 방치된 아이
이런 말 하기 쑥스럽지만, 나는 제법 예쁘장한 편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쌍꺼풀도 없고 코도 낮은 데다 엄마가 관리하기 쉽도록 병지 커트(그때는 맥가이버 머리라고 불렀다)를 했던 터라 사내아이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일곱 살을 기점으로 짙은 쌍꺼풀이 생기고, 얼굴이 갸름해지면서 콧대가 생겼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긴 이야기지만, 생김새 때문에 덕을 본 일도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친구들과 길을 가는데 모르는 언니들 세 명이 어깨동무를 해왔다. 그들은 살가운 목소리와 은근한 손아귀 힘으로 우리를 나무가 우거진 으슥한 곳으로 몰았다. 지금 들어도 고리타분하지만, 그때 당시에 들어도 진부했던 ‘가진 돈 다 내놔. 뒤져서 나오면 10원당 한 대.’라는 식상한 말을 하며. 친구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지갑이며, 가방이나 주머니 등을 탈탈 털리고 있을 때, 나는 가만히 언니들 곁에 앉아 있었다.
“너는 예쁘니까 내 옆에 앉아 있어.”
라고, 말해준 대장 언니 덕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고작 몇 살 차이도 안 나면서 꼴에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게 우습기도 하고, 어디서 본 건 있어서 갖은 폼은 다 잡고 별소릴 다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샤기 커트를 한 그 언니들의 말이 곧 법이요, 진리였다. 어쨌든 나는 외모 덕분에 어느 곳에서나 혹은 어느 사람에게서나 쉽게 호감을 샀고, 사람들의 중심은 아니어도 그 언저리는 맴돌았으며, 면접을 대차게 말아먹고 왔음에도 간신히 중국 항공사 승무원이 되었다. 비록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만 보면 잘난 얼굴 덕에 고난과 고통은 모르고 살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평범한, 아니 최소한 집다운 집에서 사는 평범한 가족 아래서 태어난 아이였다면, 정말로 장밋빛 미래가 펼쳐졌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덤프트럭들이 질주하듯 달리는 8차선 산업도로 바로 옆에 살았다. 그런 곳에 어떻게 집이 있냐고? 집이 아니니까 살 수 있었다. 지독하게 가난한 우리 가족은 남들이 흔히 말하는 ‘집’에 살 수 없어서, 커다란 비닐하우스 안에 컨테이너를 놓고 그 안에서 살았다. 학교를 가려면 2km를 걸어가야 했고, 장이라도 보려면 미국처럼 차는 필수였다. 하다못해 주변에 제대로 된 음식점도 없어서 8차선 도로 건너편에 유일하게 있던 순댓국집이 우리 가족의 외식 장소였다. 소속은 분명 경기도였으나, 가히 읍내라고 칭할 만한 시내와도 거리가 떨어져 있던 동네는 한없이 낙후했다. 동네에선 매일 술판이 벌어졌고, 누군가는 반드시 다쳤으며, 깡패가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깡패에게 맞아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살려달라고 비닐하우스에 들어온 사람의 형상을 아직도 기억한다.
부모님은 언제나 여유가 없었고,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언니들은 이미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며, 주위에 또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아무런 잔소리와 방해 없이 나의 큰 개와 공터를 뛰어다닐 정도로 자유로웠으며, 공사장 인부의 희롱에 자주 노출될 정도로 방치됐었다.
성장이 빨랐던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키가 이미 164cm였다. 산업도로를 기점으로 우리 동네에도 막 개발이 시작됐었던 것 같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곳곳에 공사 중인 건물이 있거나 공사장 인부들이 있었다. 그때는 초등학교를 걸어 다녔는데, 하교 시간이 그들의 쉬는 시간과 겹쳤던 듯싶다. 분명히 교복을 입지 않았으므로 초등학생일 게 뻔한 나를 보며 휘파람을 불고, 손뼉 치고,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입맛을 다셨다. 나는 그 시간이 정말 죽을 만큼 싫어 학교에서 친구들과 놀다 늦게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여느 때와 같이 산업도로 옆 갓길로 하교하고 있는데, 뒤에서 경적이 시끄럽게 울렸다. 바로 뒤에는 1톤 트럭이 나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고, 그 1톤 트럭 뒤에서는 우체부 아저씨가 오토바이 경적을 쉴 새 없이 눌러댔다. 우체부 아저씨의 성화에 1톤 트럭은 나를 비켜 지나갔는데, 지나가면서 창문을 내려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내 몸을 훑으며 지나갔다. 마치 아쉽다는 듯이. 그때 그 아저씨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그 길로 우체부 아저씨는 우리 집으로 찾아가 어떻게 여자아이를 혼자 둘 수 있느냐고,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냐며 부모님에게 화를 냈고, 그 후 버스 타고 등하교하거나, 반드시 아빠가 데리러 와야만 집에 갈 수 있었다. 겁이 많았던 나는 그 이래로 아빠 차 외의 타인의 차를 타본 적이 없었다. 설령 타인이 같은 성별을 가진 친구의 어머니라고 해도 말이다.
비단 도로만 위험한 건 아니었다. 화원 안에는 넓은 평상이 있었는데, 거기에 있으면 술에 취한 동네 아저씨들이 들어와서 엉덩이를 만지거나 볼에 뽀뽀했고, 좌석 버스를 타면 열에 일곱은 허벅지가 주물러졌다. 우체부 아저씨 외에 나를 그런 환경에서 구해 준 사람은 없었다. 하다못해 엄마까지도. 나는 그때부터 내 몸은 나만 지킬 수 있다고 여겼다. 치마는 교복을 제외하고 절대 입지 않았으며, 항상 몸을 가리는 벙벙한 옷들 위주로 입었다. 넌 맨날 그런 옷만 입냐고 핀잔을 들어도 그랬다. 일부러 선머슴처럼 굴었고, 목소리도 낮게 깔았다. 누군가가 나를 게슴츠레하게 바라보는 게 징그러웠다. 성적 대상이 되는 게 소름 끼쳤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런 모습은 숨기고 여유로운 척을 했고, 그런 시선을 받아서 우쭐대는 척을 하기도 했다. 단지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질까 봐서. 그런 과거가 있다면 나를 쉽게 보진 않을까 싶어서. 그러다가 만성 우울증에 시달린 내가 자기 연민이 필요해질 때면 내 입맛대로 꺼내 쓰는 에피소드가 되기도 했다. 그런 행동들이 점점 나를 수렁으로 빠트리는 줄도 모르고, 습관처럼 우울할 때 더 우울해지기 위해, 자학하기 위해, 나를 불쌍히 여기기 위해,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남의 탓이라는 핑곗거리로 삼기 위해서 사용했다. 이걸 멈추게 된 건 공사장 인부의 희롱에 노출된 그때 이후로 20년이 지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