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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블로켓 Nov 24. 2019

시골의 상식, 서울의 취향

책으로 떠나는 탐사 _ 마블로켓 북토크 No.1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다른 관점, 다른 생각을 나눠 갖는 것이다. 마블로켓은 책을 계기로 생각의 스파크가 튀는 경험, 거창하게는 세계관이 확장되는 계기를 만들고자 북토크를 강행했다. 그리고 오늘 첫 시간을 가졌다. 이 글은 나를 포함하여 북토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뼈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첫 번째 책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무코다 이발소>이다.    


저자인 오쿠다 히데오에 대한 편견은 참가자 모두 비슷했다. 대표작인 <공중그네>에서 보여준 우스꽝스럽고 시끌벅적한 분위기, 좋게 이야기하자면 해학의 코드가 <무코다 이발소>에서도 재현되지 않을까 라는 우려였다. 그러나 <무코다 이발소>는 달랐다. 시골마을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억지 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전개했다. 우울할 때만 읽는 오쿠다 히데오가 아니었다. 

도쿄에서 일하던 아들이 가업을 잇기 위해 귀향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가업은 큰 돈벌이가 되지 않는 쇠락한 마을의 이발소. 아들은 미용기술을 배우며 고향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밤낮으로 분주하다. 그리고 이야기의 대부분은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마을 주민들을 둘러싼 에피소드이다. 저자는 왜 이발소라는 업종을 등장시켰을까?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이발소는 쇠락한 마을의 상징으로 적절해 보인다. 도시에는 점점 이발소가 사라지고 있다. 헤어숍을 다니는 남자들이 늘어나고, 좀 더 그루밍에 신경 쓰는 남자라면 바버샵을 갈 것이다. 이발소는 트렌드에 밀려나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존재감이 사라지는 가게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을처럼.  


시골 출신들 


한 참가자가 서울 출신들에 대한 인상을 깍쟁이라고 표현했다. 얄미운 짓을 해서라기보다는 뭔가 설명하기 힘든 깍쟁이 분위기가 있다. 서울 출신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그들이 긋고 있는 ‘선’이 시골 출신들한테만 보인다.

그런데 조직에서는 시골 출신들이 서울 출신들보다 생존력이 뛰어난 것처럼 보인다. 왜일까? 살아남아야겠다는 강박? 시골이라는 개방사회에서 익숙해진 탓? 내 개인적인 경험을 풀어놨다.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시골 출신들이 훨씬 더 인간관계 스펙트럼이 넓다. 경북 영주 출신인 남편 얘기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이는 경향이 있다. 중산층에서 자란 친구들끼리, 공부도 고만고만한 친구들끼리, 대학에 진학하면 그 안에서 만난 친구들끼리, 졸업을 한 뒤에도 비슷한 경로를 밟고 입사한 사람들끼리 모인다. 그런데 시골 출신인 신랑만 하더라도 고향 친구들의 직업적 스펙트럼은 정말 넓다. 고향에 남아 고기 도매를 하는 사람, 주류 판매를 하는 사람, 아직도 껄렁껄렁 주먹이나 쓰는 사람, 서울로 진학해서 부장판사가 되어있거나, 교수가 되어 있거나, 방송국 PD 된 이도 있다. 넓은 스펙트럼의 친구를 가진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커지고 사람을 덜 가리고 친화력이 좋은 타입이 되는 조건은 아닐까?       



시골은 어딘가?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시골은 어디를 말하는 걸까? 다시 내 개인적인 경험. 남편 고향인 영주에서 조금 더 외진 곳에 봉하가 있다. 봉하 출신 친구들은 영주로 유학을 왔다고 하는 얘기를 듣고 처음엔 크게 웃었다. 봉하는 영주에 비해 시골, 영주는 안동에 비해 시골, 안동은 대구에 비하면 시골이다. 그런데 서울 출신들 눈에는 서울 아니면 대구도, 대전도, 심지어 부산도 시골이다. 시골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상대적인지 보여준다. 

우리는 연고, 지방색 등이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악용되어서 그런지 어디 출신이라고 말하는 게 거북한 자리가 있다. 아직 특정 이미지를 가지고 출신을 평가하는 분위기가 남아있다고 할까? 우리에 비하면 일본에서는 출신을 묻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분위기다. 하긴 이제는 후쿠시마 출신이라고 말하기 불편할지도.



시골에서 산다는 것 


할머니가 영덕에 사시고 사촌 오빠가 어부라고 했던 한 참가자는 <무코다 이발소> 속 모든 에피소드가 영덕에서 있었던 일과 거의 일치한다고 증언해주었다. 소설 속에서 중국 여자를 데려와 결혼한 남자의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영덕의 경우 중국이 아니라 베트남 여자분이었고, 소설과 똑같이 동네에서 영화를 찍는다고 동네 전체가 떠들썩했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좋았던 기억은 동전의 양면처럼 나빴던 기억을 동반한다. 참가자는 영덕에서 좋았던 기억 하나를 들려주었다. 바닷가 마을인 영덕에 작은 해수욕장이 있었다고 했다. 여름 성수기에도 바다를 전세 낸 건 마냥 가족끼리 해수욕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좋은 기억. 그러나 해수욕장에서 불판을 피워 고기를 굽자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곧 동네잔치 같은 떠들썩한 광경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쉽게 끼어들고 모여들고 커지는 것은 조금 당황스럽고 불편한 기억.  

시골에 사는 불편함 중 하나는 사적인 영역으로 사람들이 불쑥불쑥 들어오는 것. 소설 속에서도 나온다. 중국 여자와 조용히 혼사를 치르려고 했던 남자의 계획은 동네 사람들의 오지랖으로 무너진다. 여자가 중국인이라더라, 밝은 성격인 모양이더라, 결혼 전에 인사라도 다녀야 하는 거 아니냐, 이렇게 일이 커지고 만다. 

내가 선택한 사람들이 아니라 강제로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사람들과 담을 쌓고 혼자 지내는 것은 외롭고 힘들다. 그래서 섬처럼 사는 서울 사람들이 선택한 것은 ‘같은 취향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공간’을 찾아가는 것이다. 취향관, 코사이어티 등 요즘 잘 나가는 취향 공동체가 아무리 멤버십 비용이 세더라도 인기를 얻는 것은 이러한 이유다. 무작위로 만난 사람들이 아니라 선별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기꺼이 비용을 치른다. 그리고 같은 취향의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매개 업’은 한동안 전성기를 맞을 것이다. 

또 시골에 사는 두려움 중 하나는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한 참가자는 베트남에서 1년 살게 된 경험을 얘기했다. 아플 때 곤란했다고 한다. 시골 병원을 찾아가는 게 왠지 불안하고 마음이 놓이지 않더라는 것. 그래서 결국은 멀리 호찌민 시의 프랑스 병원을 갔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시골의 의료는 시골생활의 또 다른 문제다. 고향을 60년 이상 지키고 계신 나의 시부모님들도 정작 고향에 있는 병원은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자잘한 병에는 가까운 병원을 가지만, 큰 병 같다고 의심이 드는 순간엔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을 찾는다. 대학병원에서 3분 이상 만나주지 않더라도 서울의 대형병원 의사 말을 들어야 마음을 놓으신다. 서울과 시골의 의료서비스 불평등은 그 자체로 논의가 필요한 문제이긴 하다.  



시골의 상식 VS 도시의 취향


옛날에는 상식이 통했다.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타당한 기준이라는 의미의 상식 그리고 고령층의 인구분포가 높은 시골에서는 올드 제너레이션의 상식이 여전히 기능한다. 시골에 가면 ‘그건 아니지, 일은 이렇게 하는 게 맞지, 그러는 법이 어딨냐’ 이런 어른들의 말씀을 흔히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그들만의 상식이 강한 곳은 ‘텃세’가 작동하기 쉽다. 귀촌한 사람들의 고충 중에 현지인들의 텃세가 꽤 많이 거론된다. 텃세는 감정의 형태라 규정하기도 측정하기도 어렵다. 다만 텃세가 아직 유의미한 키워드라는 것은 기존 공동체에 들어가기 어려운 심리적 벽을 느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상식은 예전만큼의 가치를 잃은 듯하다. 한 참가자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제 상식보다는 개인이 축적한 지식의 아카이브가 중요해졌다는 말. 자기의 관점에 따라 모은 지식과 정보의 합이 개인에게 상식 이상의 중요한 가치를 갖게 되었다는 말. 나는 충분히 동의했다. 그래서 올드 제너레이션의 상식이 삶의 기준이 되고 있는 시골에서 사는 것은 가치관의 혼동을 겪는 일일 수 있겠다. 

언제부터인가 서울에서는 ‘취향’이 라이프스타일의 화두이자 키워드가 되었다. 지금, 취향만큼 인플레이션이 심한 단어가 또 있을까? X세대인 참가자들은 말한다. 우리에게는 ‘취향’ 대신 ‘개성‘이 있었다고. X세대에게는 ‘나는 나’라는 구호가 굉장한 의미를 가졌다. 개성이 화두가 되고 똑같은 것을 거부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지금의 ‘취향’ 사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남과 달라야 하고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하는 자아 중시 분위기. 취향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을 때 뭔가 개별화되고 다양화된 호불호를 일컫는 신선한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라이프스타일 산업이 커지면서 ‘취향’이라는 단어는 맹렬히 소비되었다. 이제는 안타깝게도 어떤 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무색무취의 단어가 되어버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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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로맨스는 죄일까? 


<무코다 이발소>에는 흥미로운 로맨스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고향을 떠나 마담이 되어 돌아온 싱글녀에게  동네의 아저씨들이 관심을 보인다.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은 아닐 테지만 이러다가 동네에서 싸움이라도 날까 봐 조마조마하다. 나이 든 남자들의 주책이라고만 봐야 할까? 

노인들 사이에 치정문제가 꽤 심각하다고 한다. 한 참가자가 들려준 이유는 이렇다. 이 사랑을 놓치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 더 이상의 사랑이 없을 것이라는 절박함에서 오는 강박. 인사이트있는 말이다. 또 다른 참가자는 댓글 시인으로 유명한 제페토씨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뉴스마다 한 편의 시 같은 댓글을 다는 것으로 유명한 제페토씨가 그 댓글들을 모아 책으로 냈다. 그중 노인에 관한 에피소드 하나. 70대 노인이 50대 여자를 총기로 난사한 사건이 있었다. 이유는 여자가 키스를 해주지 않아서. 그 사건 기사에 제페토씨는 이런 댓글을 달았다. ‘노년을 아프게 하는 것은 새벽 뜬 눈으로 지새우게 하는 관절염이 아니라 어쩌면 미처 늙지 못한 마음 이리라.’ 몸은 이미 생기를 잃고 주름으로 흘러내리고 볼이 꺼지고 검버섯이 피어올랐을지 몰라도 사랑 앞에서 마음은 내 몸의 늙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죄는 용서할 수 없지만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육신의 늙음을 거쳐 죽음으로 향하는 인간에 대한 연민은 느낄 수 있다. 노인의 사랑을 예기하면서 박범신 작가의 <은교> 속 유명한 이적요 노인의 대사도 소환되었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훈장이 아니듯이 나의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형벌이 아니다.”  



일본의 특수성 


<무코다 이발소>의 주요 사건은 아들이 가업을 잇겠다고 고향에 내려오는 것이다. 일본은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업이 있고 이 업이 3대, 4대째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는 낯선 일이다. 집안의 가업이라고 해서 자신의 의사나 재능에 상관없이 무조건 이어받는 것은 어쩐지 불합리해 보인다. 그러나 염색공장을 하던 아버지의 직물 관련 업을 이어받고 자신의 패턴 디자인 재능을 더해 오리지널 패턴 디자인 패브릭으로 성공한 메종드 키티 버니 포니(KBP)의 사례는 눈여겨볼 만하다. 



<무코다 이발소>는 희망의 뉘앙스 속에 열린 결말로 끝난다. 도쿄에서 내려온 아들이 마을을 위해 어떤 일을 도모하고 어떤 활약을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오쿠다 히데오가 던지는 질문이지 않을까? '당신이라면 당신의 고향에서 무슨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마블로켓

로컬 리서치 매거진ㅣ에디터가 제안하는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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