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쉐 영국연수기_9]
*2019년 8월에 다녀온 이야기를 정리한 글입니다.
아름다운 빌딩들 사이로 걸어가다보니 빌딩들 바로 뒤에서 널찍한 도로를 막고 열리는 메릴본파머스마켓 Marylebone Farmers’ Market 에 도착했다. 이곳은 40여팀이 참여하는 런던 도심의 대표적인 마켓 중 하나로 고소득층이 많이 거주하는 런던 남부 도심 지역의 거리에서 매주 토요일에 열린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휴가철이기도 하고 시장이 끝나가는 시간이기도 했으나, LFM 시장들 중에서도 손꼽히게 큰 규모의 시장답게 농가들도 매대를 크게 차려놓고 다양한 채소들을 팔고 있었다.
채소 부스들은 손님들이 직접 종이봉투에 원하는 만큼 채소나 과일을 담아오면 무게를 재서 판매하는 방식이었는데, 많은 손님들이 신중하게 채소를 고르고 있었다. 거리에 일렬로 늘어선 시장의 끄트머리에는 작지만 아름다운 공원이 있어서 시민들이 휴일을 즐기고, 장을 보러온 사람들도 그곳에서 쉬었다 가는 것 같았다. 크고 쾌적하고 여유로운 파머스마켓의 모습이었다.
이곳에서도 참여농가인 와일드 컨트리 오가닉스 Wild Country Organics 농장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농장은 32에이커(약 4만평)의 유리온실에서 각종 채소를 재배한다. 일반 유통업체와 거래하다가 수익성 개선을 위해 파머스마켓에서 직거래 방식으로 전환했다. 농장의 직원이 모두 50명으로 매주 토요일에 9개, 일요일에 11개 파머스마켓에 출점중이라고 한다. 다양한 토종 작물을 중점적으로 키우며 22가지 작물을 기르는데 예를 들어 그중 하나인 토마토의 경우는 19종의 다양한 품종을 키운다. 자가채종을 하며 씨앗을 이어가는 농사를 짓는데 채종까지는 농장에서 하고 모종 재배는 전문회사에서 계약재배 방식으로 길러오기도 한다고 한다. 이렇게 규모가 큰 농장에서 씨앗을 이어간다니, 반가운 이야기였다.
마르쉐는 매년 3월 ‘이어가는 씨앗’ 시장을 연다. 농부들이 한해 농사를 갈무리하며 직접 씨앗을 받아서 다시 다음 해 농사를 이어가는 것이 소중한 일이라 생각하고 응원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몬산토라는 거대 기업이 있었다. (독일 바이엘이라는 기업에 팔리면서 이제 그 이름은 없어졌다.) 이들은 80년대부터 종자 산업을 시작하며 유전자 변형 기술을 더해 지금의 GM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 유전자변형생물체) 종자를 만들고 판매하기 시작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하던 고엽제 성분과 같은 성분으로 만들어졌다는 라운드업Roundup 처럼 특정 제초제에 강한 유전자 조작 종자를 개발하여 농부들이 매년 몬산토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씨앗을 사고 그를 키우기 위해서 관련 화학 농약들을 사게 만들었다.
농부들이 매년 씨앗을 새로 사야하는 구조는 결국 농부들이 이중 삼중으로 빚을 지게 만들고 화학 성분에 내성이 생긴 땅은 황폐해지는 악순환을 만든다. 환경운동가인 반다나 시바의 말대로 이는 인도에서 면화 재배 농부들이 몬산토의 종자와 농약 값을 감당하지 못해 대규모로 자살한 수십년의 역사로도 드러났다. 그러한 농업이 반복되면서 그 농약의 독성이 고스란히 땅과 환경에도 영향을 미치고 결국 그것을 먹는 동물과 인간이 함께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유전자 변형 그 자체만으로도 논란의 여지는 여전히 크다. 관련해서 궁금하신 분은 2017년 경향신문 신년 기획으로 연재되었던 ‘세계 여성 지성과의 대화 - 반다나 시바’ 편을 검색해서 읽어보시길.
한국에서는 다행히 GMO 작물 재배가 금지되고 있고, GMO 농산물 중 대두·옥수수·카놀라·면화·사탕무·알팔파 이 여섯 가지 작물만 수입이 허용되고 있다. 몇년째 한국에서 이슈인 'GMO 완전 표시제'는 GMO농산물을 원료로 했다면 정제나 발효 과정을 거쳤더라도 표기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현재 대부분 GMO농산물을 원료로 가공하는 시중의 식용유, 당류, 주류, 간장류 등 그리고 이를 사용한 먹거리가 전부 GMO표기를 안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시중에서 사먹는 대부분의 먹거리가 GMO를 원료로 하는데 그 정보를 소비자인 우리가 알 수 없고 그래서 선택할 권리조차 없는 것. 세상에 이런 일이! 싶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게 세상이란 걸 우린 이제 알죠...
간략하게 이야기 했지만, 씨앗을 스스로 지키고 그 땅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 결국 농업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 굳이 식량주권 등 어려운 말을 쓰지 않아도 - 알 수 있다. 그러한 이유에서 많은 농부들이 스스로 씨앗을 이어가고 특히 자국의 토종 씨앗들을 이어간다. 한국에서도 ‘토종이자란다’라는 전국의 농부 모임이 있고, 씨앗도서관이나 토종벼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농부들이 토종씨앗을 찾아내 보전하고 생활로 다시 귀환시키는 농사를 이어가고 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어졌던 토종 종자들은 지금의 화학적 비료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전통적인 농법에 맞는 씨앗이기 때문에 많은 농부들이 자연적으로 친환경적인 농사를 짓게 된다. 마르쉐는 이러한 토종농부들과 함께 스스로 씨앗을 이어가는 농부들을 응원하고 함께하고자 매년 봄 첫 시장을 열고 있는 것인데,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3월의 ‘이어가는 씨앗’장은 휴장했다. 씨앗을 나누며 봄의 기운을 함께 나누던 시장을 못 열게 되어 참 씁쓸하다. (이 글을 쓰는 현재 매년 4월 봄의 맛을 전하는 들풀과 나물들을 나누던 ‘풀’ 주제의 시장도 휴장을 결정했다. 평범한 일상이 정말 그립다.)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터키의 전통요리인 괴즐레메를 파는 팀에서 간단히 요기를 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요리사님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켓에서는 반죽, 굽기, 토핑 등등 전체적인 생산과정이 눈앞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손님들이 그 과정을 직접 보고 살 수 있어 반응이 좋아요. 스트릿 핫푸드의 경우 위생상태에 대해 5개 등급으로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우리는 최고등급을 받았어요. 괴즐레메에 사용되는 밀가루는 영국의 로컬 밀을 이용하고 있어요. 터키식 괴즐레메는 밀가루 반죽 위에 각종 채소와 치즈를 올려 만드는데 토핑선택이 가능하고, 비건 메뉴도 따로 제공하고 있어요.” 이름도 처음 들어본 괴즐레메는 따뜻하고 고소한 밀반죽 안에 담백한 시금치와 치즈가 얇게 들어있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괴즐레메를 맛있게 먹어치우고 자리를 뜨려는데, 송수가 정말 좋아하는 과일이라며 영국 토종 자두를 권했다. 한국에서 흔히 파는 자두보다 좀 작고 동그랗고 파랗다. 단단한 그 열매를 손에 들었을 때부터 내게는 왠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한입 깨무는 순간... 아니, 이 맛은…!!!??? ‘요리왕 비룡’이 ‘신의 물방울’을 튕기는 느낌으로 어릴적 풍경이 확~ 소환되었다.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알아듣겠지만, 이 갑작스러운 순간이동 같은 느낌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나의 외갓집은 강원도 영월 산골에 있었다. 낡은 기와지붕에 흙벽, 나무 마루와 검게 그을린 부뚜막이 있던 정말 오래된 가난한 농가로, 창호지 문 한겹이 집 안과 밖을 구분했었다. 나는 80년대생인데도 그런 외갓집에 대한 기억이 있는 것을 큰 선물로 여겨, 마음 속에 그 풍경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외갓집 뒤안 문을 열면 돌담 틈에서 자라던 작은 나무가 있었다. 알이 맺히기만 기다렸다가 빨개지기 전부터 따먹던, 그 작고 동그란 모양에 달콤 새금하고 서걱한 식감, 씨앗이 깨끗하게 쏙 빠지던 열매. 외할머니가 ‘고야’라고 했으니 내게는 그 이름밖에 없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외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외갓집은 없어졌고 서울에 오래 살면서도 나는 강원도쪽 사람을 만나게 되면 혹시 ‘고야’를 아느냐고 물었다. 마르쉐 일을 하면서도 혹시나 그걸 키우는 농부님이 계실까 유심히 보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만날 수 없었고, 이름도 그 동네만의 사투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강원도의 토종 씨앗들을 모아내는 횡성 농부들의 작은 책자를 만났고, 거기 한 꼭지에 ‘고야’가 있었다. 그 책을 보며, 나는 눈이 확 젖어들 정도록 반갑고 외할머니와 외갓집의 뒤안이 그리워졌었다. 하지만 그 일도 몇해전이고 물론 고야를 맛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만난 것이다. 그것도 런던의 파머스마켓에서. 설명할 길은 없으나 영국의 토종 자두는 내 기억 속 강원도의 토종 자두 ‘고야’와 똑같았다. 나는 그 작은 열매를 먹고 또 먹었다. 맛에 대한 기억은 너무 강렬해서, 입속의 자두와 함께 어린 시절 외갓집에서 보낸 시간들, 가난하지만 풍성했던 맛의 시간들이 다시 내 안으로 퍼져나갔다. 뭐랄까, 영국에서 다시 만난 고야를 손에 쥐고 나는 런던의 고급 거리에서 낡은 외양간이 있던 마당을 가로질러 외갓집의 뒤안으로 뛰어갔고, 행복해졌다. 씨앗이 열매를 맺고 다시 씨앗이 되어 생을 반복한다는 것, 그것이 이 땅에서도 저 땅에서도 흙과 해와 비와 바람만 있으면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고마웠다.
글: 마르쉐친구들 쏭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 대화하는 농부시장 마르쉐를 운영합니다.
먹거리를 중심에 두고 삶을 연결하는 일들을 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