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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원 Sep 24. 2021

너도 북어지.

 

-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머리를 비우기 위해 40분을 뛰었고, 들어오는 길에 프리지아 한 단을 사 화병에 꽂았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뜨끈하게 데운 물에 호박차 티백을 우렸다. 10년 넘게 내 침대에 누운 바디필로우를 허리에 받쳐 무릎을 세우고 책을 든다. 세 장도 넘기지 못한 채 탁 소리 나게 덮는다. 내가 아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나아지지 않는다, 기분이.


-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우울을 제어하는 데 도가 텄다 싶으면 꼭 다시 이렇다.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억울할 정도로 속수무책이다. 이번 방아쇠를 당긴 건 뭐였을까. 참지 못하고 먹어버린 라면, 누군가 무심코 흘린 무례함, 맘에 들지 않는 성과, 흐린 날씨. 아니 이것들은 아니다. 알고 있다. 이번 우울은 좀 찌질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열등감에서 비롯했다. 매일 운동해도 부은 듯 둥근 내 몸에 한숨을 쉬면 머리를 스치는 마른 사람의 호리호리한 몸 선이라던가. 나는 이번 주 내내 뜻대로 성과가 나오지 않아 걱정인데 잘 되고 있다는 누군가의 소식이라던가 하는 것들. 찌질해서 더 우울하다. 어디 가서 티 내기도 창피하다.


-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관자놀이에서 뒤통수 즈음까지 이어진 신경에 먼지가 엉긴 상상을 한다. 만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면 손 끝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길게 늘어질 테다. 우울의 형태를 상상하면 끈적한 오물 같다. 요즘은 내가 성에 찬 적은 없다. 거울에 비친 나는 말라붙고 짜부라져 퀭한 눈을 했다. 싱싱한 동공을 잃은 건 언제였을까. 부족한 모습에 골몰해 찌질함을 답보하고 있으면 머리에 사이렌이 울린다.


-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상상한다. 이대로. 영원한 밤에 파묻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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