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인간 중심의 경제를 위하여』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엔 ‘경제대국’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GDP가 3만 달러를 넘었고, 5000만 이상의 국민이라는 ‘30-50 클럽’에 들기도 했습니다. ‘세계 11위 경제대국’이라는 꼭지의 뉴스 기사도 자주 접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선진국이 되었다며 내심 뿌듯해하는 우리들입니다. 세계에서 국가의 위상을 가늠하는 가장 큰 척도가 경제력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우리가 살고 있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되돌아보면 여전히 어두운 부분이 많습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에 따른 빈부격차와 소득격차는 물론이고, 노동자들의 사망 소식은 끝이 없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채 들이닥친 코로나로 인해 당장의 수입이 끊긴 사람들도 한둘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경제적으로 안타까운 소식은 우리에게 계속 있어왔습니다.
반도체 공장에 다니며 백혈병과 암에 걸려 사망한 노동자. 2인 1조로 지하철 스크린도어 수리작업을 해야만 했지만 홀로 작업하다가 사망한 비정규직 노동자. 마찬가지로 무리한 노동으로 석탄 이송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사망한 비정규직 노동자. 택배 배송을 하다 과로로 사망해 버린 택배 배송 노동자. 여전히 수없이 많은 경우,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 노동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많습니다. 매일 노동자가 3명씩 죽어나간다는 통계까지 있을 지경입니다. 지금도 노동자들 중에 적지 않은 이들이 몸이 상하고,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 내몰립니다. 장밋빛 경제발전에 어두운 부분입니다.
이뿐만 일까요?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된 환경파괴, 원자력 발전의 위험과 같이 자연환경에 해를 끼치는 발전을 줄곧 해왔습니다. 공기가 탁해지고 물은 혼탁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누군가는 돈을 쏟아부어 강의 물길을 막아 강물을 말 그대로 썩어버리게 해 버렸지요. 경제논리 아래 약한 이들, 곧 노동자나 자연환경은 계속해서 상처를 받아왔습니다. 여전히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과 지구의 울부짖음은 계속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울부짖음에 눈을 감고 귀를 닫아버리고 맙니다. 성장지상주의에 이미 매몰되어 버린 우리의 의식은 안타까움을 느끼는 감정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노동자가 죽거나 다쳐도 그 순간만큼은 마음을 아파할 순 있어도, 내일이면 다시 경제적 수치가 높아지길 바랍니다. 내가 죽거나 다치지 않으면 그만인 세상입니다. 환경오염도 ‘어떻게든 해결되겠지’라는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곤 합니다.
누구는 있는 돈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 돈에 몰두하고, 누구는 오늘 벌어 오늘 살기 위해 돈을 법니다. ‘노동의 신성한 가치’, ‘노동을 통한 자기실현’과 같은 이야기를 하면 비현실적 공상가라는 딱지가 붙기 십상입니다. 이런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노동을 한다는 것, 경제활동을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이번에 함께 나눌 책은 자본과 발전에 눈이 멀어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E.F.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입니다.
E.F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 1911~1977)는 독일계 영국인 경제학자입니다. 그는 독일 본(Bonn)에서 태어나 본과 베를린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후 영국 옥스퍼드 뉴칼라지에서 경제학을 수학한 뒤, 미국 콜롬비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엔 영국의 초청으로 그는 영국의 복지정책을 연구하고 수립하는 일을 합니다. 이와 함께 영국 국립석탄위원회 고문을 맡게 되지요. 이때 슈마허는 석탄이나 석유와 같은 제한되고,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자원을 통해서는 지속적인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석유파동이나 원자력 문제에 관해서도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그의 의견은 크게 주목받지 못합니다.
이후 슈마허는 미얀마(당시 버마)를 비롯한 제3세계 개발도상국들을 다니며 지속 가능한 경제발전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 연구합니다. 그때 그가 창안한 이론 중에 하나가 ‘불교 경제학’입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인간 발전이 그 지역에서 나오는 자원으로, 생태적으로, 지역 공동체와 어우러질 수 있는 환경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슈마허는 ‘영속성의 경제’에 천착하며 발전이라는 것이 무조건적인 자원의 소비로부터 탈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어린 시절 무신론자였던 그는 불교에 눈을 뜨고, 삶의 후반에는 가톨릭 교리에 매료됩니다. 특히 사회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가톨릭 사회교리가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레오 13세 교황의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요한 23세 교황의 『어머니요 스승』(Mater et magistra)와 같은 가톨릭 사회교리 ‘회칙’(回勅, Encyclical)들을 접하며 인간 경제에 윤리적 기준의 틀을 종교에서 찾았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경제학을 단독으로만 연구할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도덕’의 틀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의 근거가 됩니다.
잠시 교황의 ‘회칙’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회칙이란 교황이 전 세계 교회에 대해 선포하는 공식적인 문서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 반포하는 교황의 메시지인 것이지요. 교황의 이름으로 내는 메시지인 만큼 그리스도인들은 회칙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중 레오 13세 교황의 『새로운 사태』(1891)이나 요한 23세의 『어머니요 스승』(1961)과 같은 회칙은 극심한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노동문제, 경제성장과 인간의 존엄성,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부작용들에 대한 우려를 표합니다. E.F. 슈마허는 가톨릭 교회가 세상의 문제에 대해 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동의를 표합니다. 그의 저서를 살펴보면 경제학이나 경제논리를 복음과 결부시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무절제한 탐욕과 이기심을 막아낼 둑이 필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E.F. 슈마허는 그의 첫 저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1973년에 출간합니다. 영국에서 경제학자로서 보낸 경험과 제3세계를 돌며 축적된 그의 경제학적 탐구가 집약되어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 드러납니다. 그는 여기서 ‘전체주의적’(holistic) 사고를 요구합니다. ‘전체주의적’ 사고란 하나가 아닌 전체의 유기적인 ‘관계’에 주목하는 사고이지요. 각각 하나하나 따로 동떨어져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들이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의 책을 살펴보면서 그가 주장하는 건강한 경제학, 혹은 건강한 발전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전히 우리 곁엔 많은 ‘격차’가 놓여있습니다. 그것은 개인 간, 지역 간, 국가 간에 모두 해당됩니다. 부의 격차, 기술 격차, 정보 격차 등 일방적이고 불평등한 격차가 많은 이들을 갈라놓습니다. 한쪽에선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한쪽에선 굶어 죽는 ‘비상식’의 세계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유한 쪽에서는 이젠 생산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인류는 더욱 발전하리라 낙관적인 전망을 지닙니다. 하지만 슈마허는 이러한 관점이 잘못되었으며 우리의 현행 경제체제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특히 인간은 대체 불가능한 자원(석탄, 석유, 광물)에 의존하면서 자연을 파괴해 지속적이지 않은 경제발전을 해 나갑니다. 여기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영속성’(permanence)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미 아주 많아진 문제를 철저히 이해하고 새로운 생산 방법과 새로운 소비 생활을 동반하는 새로운 생활양식, 즉 ‘영속성’을 위해 고안된 생활양식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31쪽.
이미 우리는 ‘버리는 문화’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일회용품, 음식물들을 양심의 가책 없이 버리곤 합니다. 한정된 석유자원을 풍요롭게 사용하면서 대기오염을 서슴지 않고 일으킵니다. 마치 세상이 무한하다는 듯이 아무런 죄책감이나 부채의식 없이 마구마구 물질을 소비 해대고요. 그러면서 에너지가 필요하다면 원자력을 쓰자고 합니다. 넉넉하고도 깨끗하다고 말입니다. 체르노빌, 후쿠시마를 보고도 두렵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80만 년 이상이나 지나야 방사능 독성이 제거된다는 방사능 폐기물도 못 본채 합니다. 그러면서 ‘발전 신화’, ‘성장신화’에 매몰되어 환경과 안전, 유해성에는 눈을 감아버립니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1986년에 일어났습니다. 슈마허는 1973년에 발간된 이 책을 통해 이미 원자력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특히 원자력 폐기물의 맹독성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생태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은 허황된 것이며, 그저 문제를 미래 세대에 전가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심지어 지질시대를 바꿀 만한 시간 동안 모든 생명체에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는 맹독성 물질을 대량으로 저장하는 것은 그 어떠한 번영 수준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은 생명 자체에 대한 도전이다. 그것도 인간에게 가해졌던 그 어떠한 범죄보다도 훨씬 심각한 도전이다. 문명이 이러한 도전에 기대어 성립될 수 있다는 생각은 윤리와 정신, 그리고 형이상학 측면에서 끔찍한 것이다.” 186쪽.
1973년부터 슈마허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이렇게 원자력에 대한 위험을 강조해왔으나, 1986년 체르노빌, 2011년 후쿠시마에서 이 우려가 현실화되었고 여전히 위험은 진행 중입니다. 그럼에도 원자력이 인간 발전의 답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슈마허는 안전이나 환경, 유해성을 고려하지 않는 발전이나 경제론에 대해 ‘형이상학적’ 사고가 부재한 결과라고 말합니다.
“잘못된 것은 전문화가 아니라, 교육 내용이 일반적으로 깊이가 없다는 점과 형이상학적 각성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오늘날 과학교육은 과학의 전제 조건, 과학법칙의 의미와 중요성, 인간 사상의 전체 지형에서 자연과학이 차지하는 위치 따위에 대한 인식 없이 이루어진다. 그 결과, 과학의 전제 조건은 흔히 과학이 발견한 것으로 오해된다. 아울러 경제학 교육은 오늘날 경제이론의 전제조건인 인간관에 대한 인식 없이 이루어진다.”120쪽.
오늘날 우리는 많은 것들을 따로따로 생각합니다. 경제학이나 과학 기술은 인간의 풍요로움을 가져오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부를 키우는 경제학이면 만족합니다. 거기서 발생하는 불평등, 소외, 착취와 같은 문제들은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사회 전체의 부가 커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실상은 그 부가 소수에게만 몰려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회의 부가 커졌다는 신기루로 포장하면 되니까요. 많은 사람들은 거기서 떨어지는 잔여물로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과학 기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기술이 가져올 환경파괴, 인간 존엄에 대한 윤리 문제. 이러한 것들은 그들이 신경 쓸 영역이 아니라고 손 사례 칩니다. 그저 발전을 이루면 그만입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슈마허는 경제나 과학의 발전은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철학과 동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불교 경제학’이란 용어를 통해 경제윤리가 불교의 소박함이나 비폭력과 같은 가치를 담을 때 지속적 성장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근대 경제학이 소비를 경제 활동의 유일한 목적으로 여기며 토지, 노동, 자본 등의 생산 요소들을 수단’으로만 취급하는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입니다. 한정된 자원을 무한정으로 쓸 수 있다는 착각에 대한 경고이자 대안입니다.
또한 슈마허는 고전 그리스도교의 윤리덕(倫理德)에서 답을 찾기도 합니다. 이미 폐기되어버린 듯한 그리스도교 윤리관에서 긍정적 가치를 경제학에 접목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슈마허는 그리스도교 7죄종(七罪宗, 교만, 인색, 음욕, 분노, 탐욕, 질투, 나태)과 4추덕(四樞德, 지혜, 정의, 용기, 절제)을 언급하며 경제학이 신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고전 윤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과거로 회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윤리를 다시금 되새기면서 돈으로만, 물질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세태에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저자는 인류의 미래를 결정할 태도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보고 있습니다. 이름이 재밌습니다. 하나는 ‘돌진파’(the forward stampede), 다른 하나는 ‘귀향파’(home-comer)입니다. 슈마허는 이렇게 말합니다.
“돌진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지할 수 없다. 정지하면 넘어지므로, 전진해야 한다. 근대 기술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불완전한 것일 뿐이다. … 그는 ‘더 많이, 더 멀리, 더 빨리, 더 풍족하게’가 ‘현대 사회의 슬로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여기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198쪽.
반대로 귀향파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귀향파는 기술 발전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므로 그 방향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당연히 ‘귀양파’라는 용어는 종교적인 함의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한 시대를 지배하는 유행에 따라 ‘아니오’라고 말하면서 전 세계를 장악할 것처럼 보였던 문명의 전제조건을 의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요구되며, 여기에 필요한 힘은 굳건한 믿음에서만 비로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199쪽.
독자분들께서는 어느 쪽에 해당하실까요. 끊임없이, 멈춤 없이 성장하는 것이 승리의 요건일까요, 아니면 모두가 성장에 몰입하고 있을 때 ‘아니오’하며 조금 천천히 모두가 함께 가는 길을 택하는 것이 나을까요. 각자 다른 답을 가지고 있겠지만 슈마허는 ‘귀향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소박하면서도 천천히 나아가며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사고야 말로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슈마허는 ‘행복’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에서 생존의 경제학으로 이끌 수 있는 관점을 만드는 데에 상당히 정확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3-9)
이 ‘행복’을 기술 및 경제 문제에 연결시키는 것이 무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어려움에 빠진 이유는 바로 너무도 오랫동안 이렇게 연결시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에게 이 ‘행복’이 의미하는 바를 판별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 우리는 가난하지만, 반신반인(demigods)이 아니다.
- 우리에게는 슬픈 일이 많으므로, 황금시대에 들어선 것은 아니다.
- 우리에게는 온유한 태도와 비폭력적인 정신이 필요하며, 작은 것이 아름답다.
- 우리는 정의에 몰두하고 올바름을 찾아야 한다.
- 이 모든 것, 아니 이런 것들만이 우리에게 평화를 제공해 준다." 200~201쪽.
우리 사회엔(아니 전 세계적으로도) 부의 불평등이 만연합니다. 누군가는 이것이 삶의 자연스러운 이치라고도 하고, 자본주의 세계 안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일갈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돈을 바라봅니다. 있는 자는 있는 자대로, 없는 자는 없는 자대로 돈을 우러러보며 더 풍요로운 물질을 향해 뛰어갑니다. 우리가 배워 온 도덕이나 윤리는 돈의 우상 아래 가려져버리고 맙니다. 돈을 보고 전력질주를 해도 마음에 남아 있는 건 박탈감뿐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인간의 한 생이란 돈을 좇다가 끝나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고, 주식이 오르고, 부동산이 오를까 눈 감는 직전까지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애처롭고 처량한 삶입니다. 삶의 의미에 대한 사색이나 성찰은 사치일 뿐입니다. 생존 기반도 없이, 모든 생존 수단이 결여된 이들의 아픔이 눈에 들어 올리도 없고요. 우리가 배워 온 ‘측은지심’(惻隱之心)이나 ‘자비’의 마음을 돈에 팔아넘긴지도 오래입니다. 내가 만족하면 그만인 삶을 참된 인간의 삶이라 볼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인간이 자본주의라는 체제로 인해,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물질주의에 내던져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돈에 목매달지 않고 고고히 살아가고 싶어도 이 사회체계 안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주류 경제인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돈과 자본에 종속시킵니다. 끊임없이 가난을 양산하면서도 일부에 몰린 부에 대해 찬양합니다. 그럼 우리는 이 체제 안에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순응하며 온갖 불평등과 속박에 매어 살아야 하는 걸까요? 더 이상 인간이 인간의 얼굴을 하고 살아간다는 게 요원한 일일까요? 소수의 다수를 향한 착취에 눈을 감아야 하는 걸까요?
오늘날엔 자신의 직업이나 노동을 통한 자기실현의 성취란 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기계’처럼 노동하는 사람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일상에서 충분한 소득을 얻으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각자가 노동을 통해 의미 있는 일을 수행하면서도 부족하지 않은 소득을 얻을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E.F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거의 50년 전에 출판된 책입니다. 50년 전에 저술된 경제학 저서가 오늘날에도 맞아떨어진다는 건 정말 슬픈 일입니다. 50년 전 이 책에서 경고한 문제들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슈마허는 경제를 다룰 때, 과학을 다룰 때 인간의 윤리와 도덕성이 동반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는 이것을 ‘인간의 얼굴을 지닌 발전’(31쪽)이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얼굴을 몰수해버리고 돈에만 몰두할 때 과연 그것이 인간다운 인간인지 자문해봅니다. 타인을 생각하고, 환경을 생각하며 공동체의 안녕을 염원하는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가 되길 바래봅니다.
슈마허는 책 말미에서 구체적이고 새로운 경제적 생활양식에 대한 대안들을 제시하는데,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촘촘하게 구성된 슈마허의 논지를 따라가며 ‘작은 것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들과 그에 대한 대안을 직접 책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인간이 인간의 얼굴을 한 채 세상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갖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