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 사진을 기억하시나요? 지난 2015년, 시리아 내전을 피해 유럽으로 향하던 중 배가 난파되어 터키의 한 해변에 떠내려 온 세 살배기 어린아이. 알란 쿠르디(2012~2015)의 시신입니다. 이 사진을 보고는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제 생각엔 우리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크게 세 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는, ‘참 안됐네... 이런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할 텐데...’하며 사진을 보는 순간 마음 아파 하지만 이내 눈을 돌리고 다시 똑같은 일상으로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가는 것. 또 하나는, ‘나랑 상관도 없는 먼 나라 이야기군. 지금 내가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말이지. 우리나라에 저런 난민들이 기어들어오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야.’하며 심드렁하게 지나치는 것. 다른 하나는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현실이다. 내가 지금이라도 난민을 위해서 성금을 보내든지, 직접 도울 수 있는 걸 당장 찾아봐야겠어.’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실천으로 보이는 태도가 있을 것입니다.
독자분들께서는 어느 유형에 속하시는지요? (저를 포함해서)아마 대부분 첫째, 곧 사진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이런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이내 시선을 거두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신의 현실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 좋다, 나쁘다 말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정치, 경제, 사회, 종교와 같은 다양한 문제가 뒤섞인 ‘난민’이라는 거대 담론에 한 개인이 책임감을 느끼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다행히도 사진 속 아기 알란 쿠르디의 싸늘한 주검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쳐 부정적이기만 했던 유럽 난민정책의 변화를 이끌기도 했지요.)
사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다양한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앞서 본 알란 쿠르디의 사진뿐만 아니라 안타깝고,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봅니다. 전쟁의 참화를 담은 전쟁기록 사진에서도, TV에서 후원을 청하는 NGO단체의 광고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들을 보면 대부분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또 이것에 계속, 혹은 자주 노출되다 보면 무심코 넘길 때가 많아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음 안에 지닌 '연민'이나 '가엾은 마음'은 무엇이고, 또 이러한 마음들이 쉽게 무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맹자(孟子)는 인간이 가진 본성 네 가지를 사단(四端)이라 부르고 그 가운데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에겐 남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이죠. 측은지심이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참 소중한 감정이자 본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을 한 번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아픈 병자들을 고쳐주기도 하시고, 누군가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해주시기도 합니다. 또한 오병이어(五餠二漁)의 기적(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같이 놀라운 일을 벌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기적이 과연 ‘실제 일어났던 일인가’에 큰 관심을 갖습니다. 특히 무신론자들에겐 이런 기적들은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일 뿐이겠지요. 그런데 이 기적들에만 눈이 팔려 숨겨진 소중한 의미를 찾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적이 일으키기 전에 예수님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셨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기적이라는 사건을 설명하는 내용이 나오기 전에 대부분 이런 말이 먼저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예수님은 그냥 자기 자랑을 하려고, 자기의 능력을 뽐내려고, 사람들을 그저 많이 끌어 모으려고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아프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시고는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킨 유일한 원동력은 바로 ‘가엾은 마음’인 것입니다. 기적이 진짜냐 가짜냐 왈가왈부하기 전에 타인을 향해 함께 아파하는 마음, 곧 연민의 마음을 느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좀 더 명확히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타인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실제적으로 뭔가 도움을 줘야 만이 진정한 의미에 연민일까요. 현실에 많은 고통이 있지만 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저 무기력한 채 자신을 책망해야만 할까요. 이런 질문들에 대해 우리가 좀 더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해주는 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함께 다뤄 볼 책인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2004)의 『타인의 고통』입니다.
수전 손택은 1933년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미국을 대표하는 에세이 작가이자, 소설가, 예술평론가로 꼽히기도 합니다. 문학, 역사, 철학과 같은 과목을 전공하고 뉴욕 시립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등에서 철학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1966년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기고문을 발표하는데, 이를 계기로 사회 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이후 세계를 돌아다니며 독재정권 아래서 인권이 유린되고 있는 상황들을 비판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글을 쓰면서 유명세를 떨칩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이라크를 향해 시작한 이라크 전쟁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녀의 저서 『타인의 고통』은 그녀가 타계하기 일 년 전인 2003년에 출간된 마지막 작품입니다. 이 책은 현대의 다양한 시각문화, 곧 오늘날 우리가 세계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참상을 다양한 사진과 영상으로 시시각각 목격하지만 그것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양한 시각문화를 제공받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과연 공감의 감정을 느끼는지, 아니면 그 자료를 그저 하나의 소비물로서 세계 반대편의 참상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사진과 영상이라는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타인의 고통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가 이 책의 가장 주된 맥락이자 주제입니다. 작가는 현 세태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실에서도 전쟁을 구경할 수 있게 됐다.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정보, 이른바 ‘뉴스’는 비참한 모습을 시청자들의 눈에 내던져 동정심이나 격분, 그도 아니면 찬성 같은 반응을 자아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분쟁과 폭력을 대서특필하기 마련이다.” 39쪽.
오늘날은 이보다 더 하지요. 이 책이 쓰일 당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SNS나 다양한 매체를 통해 세계 반대편에 참상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계의 도처의 참상과 비극을 실시간으로 안다고 해서 우리가 더 연민을 느낄까요? 여러 가지 참상에 대해 전, 후 맥락이나 여러 가지에 관심에 가질까요? 수전 손택은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자료들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다양하게 시각화된 자료들이 우리의 감정을 무디고, 무감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20년 전에 이미 이러한 무감각함에 경종을 울립니다.
"어느 한 전쟁, 혹은 그 어떤 전쟁일지라도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사람들은 그 전쟁이 가져온 참사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감정은 곧 시들해지는 법이다." 153쪽.
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수많은 비평가들은 텔레비전 탓에 전쟁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되어버렸다고 지적해 왔다. 한번 충격을 줬다가 이내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종류의 이미지가 넘쳐날수록, 우리는 반응 능력을 잃어가게 된다. 연민이 극한 다다르면 결국 무감각에 빠지기 마련이며, 그래서 통속적인 처방이 내려지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정작 무엇인가? 대학살의 이미지를 일주일마다 계속 바꿔나가야 한다는 말인가?” 159쪽.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 곳곳의 참상을 바라보면서도 순간의 관심일 뿐, 결국 나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그저 상관없는 일로 치부해 버리고 맙니다. 많은 이미지와 영상을 통해 목격하지만 다양한 것을 보면 볼수록 그저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입니다. 기껏해야 한숨 한 번 내쉬고 다시 내 집값과 내 주식의 변동에 몰두하고 말아 버립니다.
화면이나 사진에 보이는 이들은 나와 상관없는 타자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이름도 사는 곳도 정확히 모릅니다. 저 너머 어딘가에 사는 불쌍한 사람들을 ‘관전’합니다. 그들을 ‘관전’하면서 자기 자신을 위로할지도 모릅니다.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 이들보다는 그래도 관심을 조금이라도 갖는 내가 좀 더 교양 있어 보일 것이란 생각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본심을 보면 일종의 관음증적이고, 타인의 고통을 시각화된 유희로 여기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입니다. 자극적이고 잔인한 사진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고 관심을 갖지만 그 사진이 지닌 전후의 맥락이나 고통의 원인과 같은 본질적 요소를 등한시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한 사진을 예시로 듭니다. 1890년대와 1930년대 사이에 미국에서 있었던 인종차별로 인해 희생된 흑인들의 사진입니다. 사진 안에는 백인 구경꾼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고, 그들 앞에는 나무에 목이 매달린 흑인 시체 두 구가 있습니다. 흑인들은 백인들에게 두들겨 맞고 죽은 뒤 나무에 목매달려 있습니다. 구경꾼 백인들은 웃음을 짓거나, 희생자를 배경으로 해서 사진 쪽으로 포즈를 잡기도 합니다. 아주 비인간적이고 사악한 장면이지요. 이 사진을 두고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대체 이런 사진들을 전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들의 분노를 일깨우려고? 사람들을 ‘후회’하게 만들려고,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슬퍼지게 만들려고? 애도 작업을 도와주기 위해서? 이제는 이 끔찍한 일들을 처벌할 수도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꼭 이런 사진들을 봐야만 하는 것일까? 이런 이미지들을 본다고 해서 우리가 더 선량해지는 걸까? 이 사진들이 정말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고 있기는 한 것일까? … 흑은 희생자들의 이미지를 둘러싼 대중들의 관음증적 욕구를 부추기고 영속화하지 않을까. 혹은 사람들을 이런 이미지에 무뎌지게 만들지 않을까 염려했다.” 140~141쪽.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의미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됩니다. 저자는 듣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내젓게 만들 도발을 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연민’이라는 가면 아래 자신의 유희와 만족을 채우고 있지는 않은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잔인하거나 고통스러운 것에 시선을 두는 행위가 연민의 감정인지, 관음증적인 인간 본성에 의한 시선인지 식별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이 책 6장에서는 인간이 잔인한 장면이나 그 현장에 대해 관심을 갖는 본성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연민이라는 감정에 대해 독자에게 아래와 같은 제언을 남깁니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154쪽.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바다에서 죽은 난민 아이 알란 쿠르디를 봅니다. 수전 손택의 제언에 따르자면 우리가 사진을 보며 저 아이의 고통스러운 죽음의 원인이 나와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저 아이의 죽음의 나의 탓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지요. 살짝 생각해보기만 해도 허무맹랑합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어린아이의 죽음의 탓이 나의 특권에 있다니요.
하지만 저자의 제언은 분명히 우리에게 큰 성찰 거리를 던져줍니다. 사진 속 타인의 고통이 나와 과연 연결될 수 있는 것인가. 일단 타인의 고통을 ‘응시’하는 것과 그것을 나와 ‘연결’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불러옵니다. 타인을 ‘응시’하는 데에는 어떤 거리낌도 없습니다. 아무런 죄책감도, 부채의식도, 책임감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의 원인이 나에게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나와 연결이 되어 있다면? 이러면 문제는 전혀 달라집니다. 사진 속 타인의 고통의 원인을 찾고 어떻게든 참상을 극복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야만 합니다. 나와 관련된 것이니까요.
타인의 고통과 나를 연결시키는 것은(실제적인 인과관계를 넘어) 나 자신에게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아무런 비판 없이 불의를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배척하고 반목하는 문화 안에서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성찰해보게 됩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죽은 목숨으로 해변가에 떠오른 아이의 시신을 보며 나의 무관심이 저 아이를 비롯한 내 가까운 곳에 난민들을 여전히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항상 남을 볼 때 나는 그저 구경꾼으로 그 고통을 유희하고 있지는 않은지 등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고요. 저자는 지금까지의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동시대의 정치와 문화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 무엇이 비상식적으로 번성하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조차 이성의 죽음, 지식의 죽음, 순수 문학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죽음을 알려주는 소문들까지 별 성찰 없이 수용해 왔던 듯싶다.” 162쪽.
오늘날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이미지들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중에선 인간이 인간다울 수 없는 참상과 비극을 담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많은 경우 마음 아파하긴 하지만 그것을 나와 연결시킬 생각을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문제의식을 갖기도 어렵고요.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통해 연민의 시작은 타인과 나의 ‘연결’에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대의식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임을 기억합니다. 연대의식이란 게 다소 거창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관심을 갖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나의 시각적 만족을 위해 소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타인과 어떠한 연결고리를 맺고 있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전 손택의 저서 『타인의 고통』은 우리에게 ‘연민’이라는 감정이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움직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정표를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의 무감각하거나, 타인의 고통을 인식하더라도 그 순간 일뿐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먼 세계의 일이라 치부해 버리면 연민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연민으로 가장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음증적 만족감만을 채울 수도 있습니다. 연민의 마음의 본질이 무엇이고, 타인의 고통을 나와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 위 서평은 2011년에 인쇄된 ‘도서출판 이후’의 번역본을 읽고 작성했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이 책의 딱딱한 번역투와 부자연스러운 복문(複文)들이 가독성을 심히 떨어뜨린다는 점입니다. 다행히 책은 두껍지 않습니다. 조금의 인내심(아니 꽤나 많은 인내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을 갖고 읽으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수전 손택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