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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말구 Aug 13. 2020

[서평]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

스콧 라이트, 『희망의 예언자 오스카 로메로』

  가톨릭 교회에는 많은 이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거나, 순교하신 분 가운데 그 공적이 분명하신 분을 꼽아 ‘성인’(聖人)으로 선포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신앙의 탁월한 모범이 될 만한 분들을 교회가 공인하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2000년이 넘는 가톨릭의 역사 안에서는 많은 성인이 탄생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교회가 선포한 성인은 약 6000분가량 됩니다. 우리나라엔 조선시대에 순교하신 103분의 순교성인이 계십니다. 124분이 복자(福者, 성인의 전 단계로서 거룩한 삶이 인정되나, 성인으로 선포하기 전에 아직 심사가 남아있는 상태)가 되셨습니다. 124분을 시복(諡福, 복자로 선포함)하기 위해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한국에 오셔서 광화문에서 미사를 하셨지요.

  하지만 이렇게 성인이 되고, 복자가 되는 절차는 아주 까다롭기로 유명합니다. 그들이 과연 흠 없이 탁월한 신앙의 삶을 살았는지, 무언가 자료의 오류가 있지는 않은지 등에 대한 많은 절차가 쌓여있습니다. 이 모든 심사를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교회는 성인으로 선포하는데 그 기간은 약 20년가량 걸린다고 합니다. 그만큼 성인으로 선포하는 데 많은 심혈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지난 2018년 10월 14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엔 수만 명의 군중이 시성식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엘살바도르의 대주교 오스카 로메로(Oscar Romero, 1917~1980) 대주교를 비롯하여 일곱 분의 시성식에 참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출처: https://www.vaticannews.va

오늘의 서평에서 다룰 책은 바로 몇 해 전 성인품에 오르신 오스카 로메로 성인의 관한 평전, 『희망의 예언자 오스카 로메로』입니다.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남미 엘살바도르의 가톨릭 교회 대주교입니다. 당시 1970년대와 1980년대 엘살바도르에서는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로메로 대주교는 독재정권의 탄압과 폭력에 비폭력 저항을 하며, 그들에 의해 살해되고, 인권이 유린된 국민들의 편에 섰습니다. 그 결과 그는 1980년, 당시 군부 테러조직에 의해 암살되어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사회에 만연하던 불평등, 폭력과 탄압, 살인과 고문이 공공연히 일어나던 시절에 로메로 대주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빛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어둠은 그 빛을 앗아가려고 했습니다. 평전의 저자는 평전을 시작하며 로메로 대주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은 1980년 3월 24일, 미사 도중 암살당한 엘살바도르의 대주교 오스카 로메로의 이야기다. 로메로는 우리 시대의 예언자이자 성인이며 순교자다. 나자렛 예수와 마찬가지로, 그는 역사에 남은 죽음을 맞았다. 하느님에게 충실한 삶을 살았던 로메로 대주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조국의 정권에 저항했다. … 로메로의 삶은 여러 면에서 나자렛 예수의 삶과 닮았다.” 23쪽.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면서 까지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원했던 로메로 대주교의 삶은 우리에게 큰 각성을 불러일으킵니다. 사실 로메로 대주교는 약자의 편에 서면서 자신이 암살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의 주변엔 군부 테러조직에 의해 암살된 신부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고위직인 그에게도 그런 테러가 일어날 것은 명약관화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세상에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으려 했습니다.


  성경의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계실 때,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14)


  자기 자신을 희생할 때, 자기 자신을 내놓을 줄 알 때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많은 경우 우리는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잃지 않으려 전전긍긍하곤 합니다. 부와 명예, 건강. 이 모두 필요한 것이지만 필요 이상의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또는 탐욕스럽게 그것들을 더 얻으려 노력하며 삶을 살아가곤 합니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인 죽음 앞에서 그러한 것들이 지닌 열매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요. 아니면 남을 위해, 나보다 아프고 어려운 이들에게 나의 시간과 노력을 공유한 사람의 삶의 마지막 때에 열매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요.


  이 책은 로메로 대주교의 어렸을 때부터의 삶을 조명합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로메로 대주교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성장합니다. 신학교에 입학한 뒤,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사제서품까지의 공부를 마칩니다. 사제가 된 뒤에는 엘살바도르에 있는 교구로 돌아와 본당 사목, 교구장 비서, 엘살바도르 주교회의 사무총장과 같은 업무를 수행합니다. 그는 누구에게나 친절함을 베풀었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선한 목자로서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로메로 대주교는 교회의 급진적인 모습, 곧 사회 정의를 위해 가장 먼저 앞장서는 것에 대해서는 망설였습니다. 이 책에선 그의 동료 사제의 그 당시 회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로메로는 교회활동과 유사한 모임에는 아무 데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교구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성직자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로메로는 당시 엘살바도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받아 급진적 성향을 띠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제들을 마주치는 일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서류 속에 파묻혀 사무실에 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81~82쪽.


  당시 남미 가톨릭 교회에서는 억압받는 현실, 폭력과 탄압에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는 민중의 편에 서려고 하는 흐름이 포착됩니다. 이러한 분위기 아래서 유명한 ‘해방신학’이 움틀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노릇이니 독재정권과 그것을 비호하는 세력을 비판하는 가톨릭 교회는 당시 권력가들에게 눈엣가시였습니다. 그러나 로메로 대주교는 교회와 정치가 뒤섞여 있는 걸 걱정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메로는 주교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조용하고 겸손한 로메로 대주교였지만 그는 교회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에 관해서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신의 가까운 동료, 혹은 후배 신부들이 독재정권의 테러범들에게 암살되어 죽어나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불의한 정권에 맞서다가 군인들에게 살해당하고 고문당해왔습니다. 가까운 동료 신부의 죽음을 체험하고 목격하고서야 비로소 로메로 대주교는 현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로메로 대주교는 살해된 가까운 동료 신부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 암살에 대한 항의로 엘살바도르 몰리나 전직 대통령에게 현임 대통령이 암살과 관련된 배후 세력을 찾아낼 것을 촉구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본인 역시 어떠한 정부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란 메시지와 함께 말이지요. 그리고 교구 내 모든 성당의 미사를 취소하고, 연대하고 항의하기 위해 모든 교구민들이 한 곳에서 미사를 봉헌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로메로 대주교는 장례미사 다음 주일인 3월 20일에 대교구 내 모든 미사를 취소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대신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와 다른 2명의 희생자의 죽음에 항의하고 연대를 과시하기 위해 산살바도르 대성당에서 합동 미사를 올릴 계획이었다.” 118쪽.


  이후 로메로 대주교는 정권에 폭력에 저항하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온갖 불평등 앞에서 가난에 허덕이는 민중의 아픔을 대변했습니다. 그 어떤 폭력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용인될 수 없음을 외쳤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의 탄압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작가는 당시 상황 중 하나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군대는 성당을 부수고 군인 막사로 사용했다. 군인들은 총을 쏘아 감실(龕室, 성체가 모셔져 있는 곳)을 열고 성체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길라레스에서 일하던 예수회 사제 3명은 억류되었고 이후 강제 추방당했다. 로메로 대주교는 아길라레스로 가려고 했지만 군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40쪽.


  이 당시 엘살바도르는 야만에 가까운 상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폭력으로 약자를 굴종시키려는 권력, 혹은 악의 힘은 점점 야만적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폭력으로 타인을 지배하고 짓누르려는 인간 본성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인지는 항상 저에게 의문으로 남습니다. 탐욕은 인간의 양심을 가려버리고 맙니다. 소수의 탐욕과 권력은 다수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이러한 불의 앞에서 약자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얼마 없습니다. 현실에 순응하며 아픔과 고통을 안은 채 살아가거나,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불의에 항거하는 것이 선택지로 남아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 방향이든 분명한 것은 두 가지 선택지 모두 다 아픔과 상처를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는 당시 로메로 대주교의 많은 강론들도 담겨 있는데 그중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교회는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 가난한 이들의 권리의 수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해방을 위해 평등을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역사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사회, 공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모든 정당한 투쟁을 이끌고 지지해야 합니다. 투쟁이 폭력으로 흐르지 않고 인도주의적 방식으로 펼쳐지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소명을 따리기 위해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이들과 연대하고 위험을 함께 감수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숙명처럼 겪어야 하는 박해를 같이 견뎌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격하는 위대한 사랑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15쪽.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찾던 로메로 대주교는 정권과 군부의 제거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음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권력자들에게 고위 성직자가 지닌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로메로 대주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홀로 다니지 말고, 주변에 경호 인력을 둘 것을 간곡히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로메로 대주교는 그러한 것들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나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나는 암살자를 용서하고 축복한다고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그들이 시간낭비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주교 한 명이 죽을지라도 하느님의 교회와 국민들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275~276쪽.


  1980년 3월 24일, 로메로 대주교가 미사를 집전하고 강론을 하고 있을 때에 총성이 울렸습니다. 그 총알은 로메로 대주교의 심장을 관통했습니다. 로메로 대주교는 죽음으로서 정의를 증거 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가난하고 고통받고 폭력 앞에 무방비 상태로 놓은 이들 곁이라는 사실도 우리에게 알려줬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희생은 더 큰 불꽃을 사람들에 마음속에 불러일으킵니다. 십자가 위에서 힘없이 죽어 가신 예수님이 여전히 많은 이들의 가슴에 불꽃을 태워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로메로 주교의 장례미사 때엔 수많은 군중이 모였습니다. 여전히 군부는 그들에게 총을 쐈습니다. 많은 이들이 총에 맞아 숨졌고, 총소리에 사람들이 놀라 성당 건물 안으로 피하려 할 때 너무 많은 사람이 모여 수십 명이 깔려 죽은 참사까지도 일어났습니다. 폭력은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 정의와 평화의 의미를 새겨줬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로메로 대주교의 삶을 그의 삶과 예수님의 산상수훈(마태 5~7장,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로 시작하는)과 비교합니다.  


  “로메로 대주교에 대한 기억은 산상수훈의 행복의 의미와 닮아있다. 예수의 산상수훈은 지금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알려준다. 가난한 사람들이 소외되고 배고픈 사람들이 잊히는 사회, 숨어서 몰래 슬퍼해야 하며 박해로 희생자들이 오히려 추궁당하는 현실은 세상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고 가르쳐준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축복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289쪽.

  가난한 이들이 행복할 것이란 희망이 로메로 대주교를 정의를 위해 투신하게끔 이끌어 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로메로 대주교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정의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가톨릭 국가가 다수인 남미에서 가톨릭을 대표하는 ‘대주교’란 자리는 사회적인 영향력이 코 작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 자리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리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로메로 대주교는 현실에 눈을 감지 않았습니다. 희생당한 사람들을 보고 가슴 아파하고 많은 피해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위로해줬습니다. 밀알이 죽어서야 큰 열매를 맺듯이 로메로 대주교도 죽으면서 까지 많은 이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엘살바도르의 모습과 현재 우리의 모습을 비교해 볼 때 분명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겠지만 그래도 권력이라는 속성은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가진 자, 있는 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더 세게 움켜쥐려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법을 제정해도 그 법이 자신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럼 가난한 이들의 권리는 무엇일까요. 없다는 이유로 아무런 권리도 내세우지 못하고,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이럴 때 권력은 무력을 사용하곤 합니다. 우리도 그런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오늘날엔 다행히도 정의 앞에 불의한 권력은 무너졌습니다. 4.19 때 그랬고, 광주에서도 그랬고, 광화문 촛불에서도 그랬습니다. 어둠의 권력으로 빛의 정의를 이겨낼 순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둠의 세력은 여전히 우리 곁에 그늘져 남아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로메로 대주교와 같이 정의를 위해, 많은 이들의 안녕과 권리를 위해 애쓴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그때의 일을, 그때의 인물을 ‘기억’하면서 마음 안에 희망의 불씨를 계속해서 타오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사 예전에 일이 실패한 것일지라도 ‘기억’을 통해 다시 한번 해볼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닐 수도 있습니다. ‘기억’이 지닌 영향력은 우리를 다시 어둠으로 끌고 가지 않을 것이며, 희망의 단초가 될 것입니다.

  로메로 대주교의 평전을 읽어보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갔던 인물을 ‘기억’하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안락을 위해서 몰두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타인을 위해 희생했고, 지금도 희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특히 가장 낮고, 힘없고, 보잘것없는 이들의 편에 서서 정의를 외친 로메로 대주교의 모습에서 예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불의한 권력이 여전히 세상에서 판을 치고 있다는 생각에 좌절해보신 분들이 이 책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빼앗기고 상처 입은 사람들 곁에 그들의 편을 들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이자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인지를 맛보고 싶은 분들에게도 이 책을 권합니다. 로메로 대주교의 평전을 통해 상대를 짓밟고 억누르는 것은 결코 답이 될 수 없음을,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건강한 삶임을 새삼 기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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