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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말구 Aug 05. 2020

[서평] 시련과 고통 안에서도 인간으로 살아남기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우리 삶에는 언제나 뜻하지 않은 고통이 뒤따릅니다. 뜻하지 않은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쑥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되돌이킬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을 얻는다거나, 경제적인 파탄이 초래되는 경우를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보게 됩니다. 그 일이 내게 닥치지 말란 보장도 없고요. 모든 존재는 뜻하지 않은 고통 앞에서 언제나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다는 생각까지도 듭니다.

  구약성경의 「욥기」를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욥’이라는 인물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던 거룩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악마가 하느님께 도발합니다. 욥이라는 인물이 하느님 뜻에 따라 사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복을 내려주었기 때문이지, 그에게서 복을 거둬간다면 하느님께 등 돌릴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악마에게 욥의 모든 소유를 넘기되 욥을 해치는 일만은 하지 말라고 이릅니다.(욥 1,8~12)   

고난 받는 욥 (출처: maria.catholic.or.kr)


  이 어처구니없는 악마의 도발로 인해 욥은 가진 재산을 모두 잃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 모두를 잃습니다. 탄탄대로였던 지난날과는 달리 고통이 점철된 삶이 시작됐습니다. 욥은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당하자 하느님께 탄원합니다. 자신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셨냐고 말입니다. 욥의 고통은 점차 심화되지만 그래도 욥은 끈질기게 하느님께 희망을 둡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과 시련 앞에서 마저 욥은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마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욥기를 통해 고통에 내던져진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묻고 찾게 됩니다. 온갖 고통 안에서도 하느님께 희망에 뿌리를 둔 욥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고통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 생각하게 해주는 지혜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성경에 저술된 욥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알 수 없는 고통과 시련 앞에 내던져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있다고, 끈질긴 생명력 안에서 자그마한 희망의 씨앗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함께 다룰 책은 고통 안에서도 우리에게 희망을 심어줄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입니다.


  소설가 박경리(朴景利, 1926~2008)는 새삼 길게 소개를 할 필요도 없을 만큼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대하소설 『토지』가 가장 유명한 작품일 테지요. 소설가 박경리는 1926년 통영에서 출생했습니다. 1950년에 수도여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로 재직합니다. 이후 소설가이자 시인 김동리(金東里, 1913~1995)의 추천으로 문학계에 발을 딛습니다. 이후 『불신시대』, 『시장과 전장』, 『김약국의 딸들』, 『토지』와 같은 작품들로 한국 문학사에 굵직굵직한 흔적을 남깁니다.

  이번에 다룰 『김약국의 딸들』은 1962년에 발표되었습니다. 박경리의 작품 세계나, 문체의 하나의 분수령이 된 작품이라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김약국의 딸들』이라는 작품의 배경은 박경리의 고향 통영을 배경으로 전개됩니다. 통영에 있는 ‘김약국’이라는 인물의 가족의 몰락을 그리고 있습니다. 김약국은 큰아버지가 하던 약국을 물려받아 운영하다가 그것을 그만두고 어장(漁場)을 경영하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를 ‘김약국’이라 불렀습니다. 어장 관리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큰 부를 쌓게 됩니다. 김약국에겐 아내 한실댁과 다섯 딸이 있습니다. 순서대로 ‘용숙’, ‘용빈’, ‘용란’, ‘용옥’, ‘용혜’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점차 어두운 운명의 그늘이 짙어져 갑니다. 이들 삶의 궤적은 책의 거의 막바지 부분, 둘째 용빈의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고아로 자라셨어요. 할머니는 자살을 하고 할아버지는 살인을 하고, 그리고 어디서 돌아갔는지 아무도 몰라요. 아버지는 딸을 다섯 두셨어요. 큰딸은 과부, 그리고 영아 살해 혐의로 경찰서까지 다녀왔어요. 저는 노처녀구요. 다음 동생이 발광했어요. 집에서 키운 머슴을 사랑했죠. 그것은 허용되지 못했습니다. 저 자신부터가 반대했으니까요. 그는 처녀가 아니라는 험 때문에 아편쟁이 부자 아들에게 시집을 갔어요. 결국 그 아편쟁이 남편은 어머니와 그 머슴을 도끼로 찍었습니다. 그 가엾은 동생은 미치광이가 됐죠. 다음 동생이 이번에 죽은 거예요. 오늘 아침에 그 편지를 받았습니다.” 408~409쪽


  김약국 부부와 딸들 모두에게 비극이 닥칩니다. 가세는 기울고, 딸들은 제대로 된 시집을 가지 못하고 과부가 되거나,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곤 합니다. 심지어 한실댁은 사위에게 살해당하기까지 합니다. 온갖 고통이 그들 가족에게 닥친 것이지요. 김약국의 가족은 크게 죄지은 것도 없이 고통과 수모를 겪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여러 가지 일들은 꼬여만 가지만 어머니 한실댁은 조금이나마 생활이 좀 더 나아질까 전전긍긍합니다. 그렇지만 해결되기는커녕 아편쟁이 사위에게 어이없이 살해되고 맙니다.

  사실 한실댁은 대단한 걸 바랐던 것이 아닙니다. 김약국은 아내 한실댁에게 나쁜 행동을 하진 않았지만 그녀에게 정을 주지 못했습니다. 한실댁은 사촌 시누이 ‘윤씨’를 보고 항상 부러워합니다.


  “(김약국의 고종사촌 형 이중구와 윤씨)두 내외는 계집아이도 없이 퍽 외롭게 살고 있었지만 언제든지 다정하고 흡족한 노부부다. 마누라가 밥을 지으면 영감을 장작을 패고, 생선 한 마리라도 맛나게 보글보글 지져서 머리 맞대고 의좋게 먹는다. 평생 겸상해서 밥을 먹어본 일이 없는 한실댁은 그런 광경을 보면 망측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였다.” 180쪽.


  그리고


 “한실댁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 돌았다. 아들 형제를 남부럽지 않게 공부도 시키고 큰아들은 의사까지 되어 모든 근심 걱정을 던 윤씨 앞이라 더욱 설움이 북받치는 모양이다.” 132쪽.

성가정 (출처: maria.catholic.or.kr)

  일상에서의 소소한 행복이 눈물 나도록 그리웠던 경험이 있으신지요? 하지만 이 소소한 일상의 행복은 그 안에 있을 때 왜 깨닫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같이 얼굴을 맞대고 식사하고, 눈을 마주치는 이 단순한 생활을 그리워하는 삶이란 안타깝기만 합니다. 또 어떠한 경우엔 자신이 소소한 행복을 지니고 있음에도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 자책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남이 더 가지고, 더 잘난 것을 두고 배 아파하며 살아가는 우(愚)를 범하기도 합니다. 한실댁의 생각을 통해 일상의 소소한 일들도 누군가에겐 눈물을 일으킬만한 소중한 것임을 기억하게 됩니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지 못할 때 삶의 우환이 닥쳐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김약국은 잘 되던 어장 사업과 더불어 큰 배를 두 척 구입하여 원양어업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고가 일어납니다. 그 배엔 동네 사람들이 선원으로 올라타 있었습니다. 배는 물론이고 선원들까지 실종되고 맙니다. 김약국은 큰 빚을 지고 배를 구입했던 것인데 그의 계획이 물거품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죽은 선원의 가족들은 김약국 집에 몰려들어 보상을 요구합니다. 김약국은 이미 큰 배 두 척을 사들이기 위해 큰 빚을 지어버렸는데도 말이죠.

  김약국 집안에 가세는 점점 몰락해 갑니다. 일찍이 과부가 된 첫째 딸 용숙은 특유의 수완으로 인해 돈을 많이 버렸지만 가족이 자기를 괄시했다는 이유로 결코 가족을 돕지 않습니다. 둘째 딸 용빈은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셋째 딸 용란은 아편쟁이 남편한테 두들겨 맞으며 지내는 판이었습니다. 넷째 딸 용옥도 시집을 가서 시댁 살림에도 바쁜 처지. 막내 다섯째 딸 용혜는 여전히 어렸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약국 집안에는 우환 가득한 일들만 들이쳤습니다.

  자기 자신과 가족이 어려움에 놓여있을 때 이웃에게 눈을 돌릴 수 있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악착같이 애를 써서 돈을 모으든, 일을 하든 할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생각하기엔 나의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김약국의 부인 한실댁은 조금 달랐습니다. 마음 안에 새겨진 양심과 연민의 크기가 작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한실댁은 길에서 비쩍 마른 아이와 아이의 어미를 발견합니다. 허술한 초가에 살고 있는 가난한 이들이었지요. 게다가 아이 어미는 다리까지 절고 있습니다. 집의 행색을 봐도 제대로 먹을 것 하나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침몰한 배에 타고 있던 아내와 아들이었습니다. 물론 남편은 그 사고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사고를 일으킨 김약국의 아내를 알아보고 짐짓 적의(敵意)를 품은 태도를 보입니다. 하지만 한실댁은 그 아이에게 떡을 사 먹이고, 어미에게는 수중의 돈을 모두 쥐어줍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집안일을 보는 아이에게 시켜 그 집에 이것저것 가져다줍니다.  


  집으로 돌아온 한실댁은 헌 옷가지를 챙겨서 여문이를 시켜 굴 너머 다녀오라고 했다. 얼마 후 돌아온 여문이는,

  “어무이, 참 불쌍합디다. 울어쌓대요.”

  “누가?”

  “젊은 여자는 좋아서 입이 함백이처럼 벌어지는데 그 절룸발이 어매는 자꾸 울어쌓아서 참 불쌍해 죽겄십니더.”

  “그래?”

  “진작 알았으믄 갖다 줄 거로.”

  “어디 그런 사람이 한둘이겄나? 내일 댄장 좀 갖다 주어라. 소금도 없는 갑더라.”

  “우리도 댄장은 모자랍니더. 어장에 다 퍼가지고 조금밖에 없십니더.”

  “우리는 동문 밖 성님 댁에서 얻어다 묵지. 무슨 식구가 있나.” 266쪽


  한실댁은 자신의 가세가 무너져 가는 데도 가난한 사람을 무심히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름깨나 떨치던 가문에서 된장이 모자란 것 자체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터인데 얼마 남지 않은 된장을 그 가난한 집에 보내기로 합니다.

  한실댁은 다행히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인간이더라도 인간의 얼굴을 거두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이웃에 고통이나 아픔에 관심을 두는 건 ‘사치’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내 것을 남에게 준다는 건 얼토당토않는 일로 치부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한실댁은 이웃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놓지 않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족해도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을 놓치지 않습니다. 한실댁을 통해 인간이 지닌 사랑과 연민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남편에 대한 걱정, 딸들에 대한 걱정, 집안에 대한 걱정. 끊임없는 걱정과 시련에도 주변을 볼 줄 아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힘이야 말로 고난 속에서 빛나는 인간의 한줄기 희망임을 기억해 봅니다.


  김약국 집안은 가세가 기울고 더 이상의 고난을 겪을 것 마저 남아있지 않아 보이는 상황에 이릅니다. 김약국은 병세가 짙어져 갔습니다. 둘째 딸 용빈은 김약국에게 사촌오빠가 있는 진주도립병원에 가서 진료를 해보자고 하나 김약국은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설득 끝에 용빈은 겨우 김약국은 진주 도립병원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진료를 받기 전날 용빈은 김약국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

  “무슨 생각을 하구 계세요?”

  “음..... 감이 소담스럽게 열렸구나.”

  “아버지!”

  “.....”

  “이번 진단 받아보시구 서울로 가시지 않겠어요?”

  “.....”

  “용혜도 공부를 계속해야 할 거예요. 서울 바닥은 넓구... 모든 것 잊으시구... 아버지가 너무 외로우세요.”

  “서울이라고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인가?”

  외롭다는 말과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냐고 되묻는 말은 상반된 대화다. 그러나 용빈은 김약국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에 외로움이 있다.’

  용빈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359쪽


  용빈은 아내도, 자식도 잃은 아버지 김약국에게 서울에서 지낼 것을 권유합니다. 사람이 많은 서울로 가면 조금이나마 덜 외로울까 하는 마음에서 말이지요. 하지만 김약국은 ‘서울이라고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인가?’하고 되묻습니다. 역설적인 대답입니다.

  사실 김약국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정(情)을 나누지 못했습니다. 아내 한실댁에게도, 딸들에게도 살가운 사람이 아니었지요.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언제나 조용히 홀로 생각하고, 홀로 결정 내리던 사람입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이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사랑과 대화를 나누지 못하면 외로움을 느끼는 인간입니다. 주변에 있는 존재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을 점점 소외시키는 꼴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현실에서도 목격합니다. 가족이라 해도 대화하지 않고 서먹서먹할 경우도 있겠고, 사람을 많이 만나면서도 허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외로움이란 타인이라는 존재의 유무가 아니라 타인을 향한 마음의 유무에 달렸음을 새삼 생각해봅니다.

  타인을 내 안에 받아들이려는 마음 없이는 우리는 언제나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뜻한 마음이 없다면 소설의 김약국처럼 아무리 사람이 많은 서울에 간들 어찌 외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외로운 것은, 내가 고독한 것은 아직 마음에 타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삶 안에서도 기쁨과 행복은 타인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누군가와 공감을 하며 삶을 나눌 때 내 마음 안에 흘러들어 올 수 있음을 생각해봅니다.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은 독자로 하여금 약간의 불쾌감을 줄 만큼의 비극이 연속해서 나옵니다. 딸들은 모두 하나같이 시련을 겪고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여성으로서의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이 소설은 가부장적 사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이나 의미에 대해서도 성찰해 보게 합니다.) 딸들의 아버지, 어머니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온갖 비극 안에서 희망의 빛줄기를 발견한다는 게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실패한 인생, 괴로움으로 점철된 인생이라고 평할 수 있는 삶 안에서 조차 희망을 발견한다는 게 역설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질긴 생명력으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독자에게 위로를 남겨줍니다.

  지금 자신의 고통과 어려움에 허덕이고 있다면, 이 책을 통해 고통 안에서도 어떻게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을 어렴풋이나마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삶이 소설 속 딸들과 같이 시련의 연속일지라도 그것을 담대히 받아들이며 꿋꿋한 생명으로 살아나갈 수 있는 힘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 관계 맺으며 매일매일 더 나은 인간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우리에게 선사해 줄 것입니다. 알 수 없는 고통, 이유 없는 시련 안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마음 한 켠에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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