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 게르하르트, 『하느님과 별』
저는 개인적으로 우주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주라는 낯선 공간에 대해 그나마 구체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공간에 광활히 펼쳐진 우주를 상상할 때면 저는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동시에 두려움 같은 감정이 느껴져 소름이 끼치기도 합니다. 현대 물리학이나 천문학에서 밝혀낸 사실들을 토대로 보면, 우주 안에서 지구는 말할 것도 없고, 태양계, 태양계가 속한 은하까지도 너무나 작은 미물로 보입니다.
우리가 속한 은하에는 태양과 같은 항성이 약 4000억 개 정도가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은하가 약 1000억 개에서 2000억 개정도가 있을 것이라 추정하니, 우주란 도무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공간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우주’란 ‘관측 가능한 우주’에 불과하다고 하지요. 끝없이 펼쳐진 우주 안에서 인간을 떠올리면 그 존재의 의미가 너무나 미약하게 느껴집니다. 이 조그만 지구에서 끊임없이 갈등과 반목을 일삼는 인류를 생각해보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물리학과 천문학, 또 우주에 갈 수 있는 기술력을 지닌 현대에도 우주는 여전히 신비와 미지의 공간입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우주는 미지의 공간일진데, 과거 지구상의 인류들에게는 하늘의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이 더욱 신비로운 존재였을 것입니다.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후 하늘은 신비의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류에겐 하늘에 ‘신’이 존재하고, 저 하늘 어딘가에 자신이 죽은 뒤 돌아갈 고향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란 믿음도 생겨났겠지요. 알 수 없는 하늘은 신의 자리이자, 영적인 공간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늘과 하늘의 별들은 종교적인 의미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하늘 위로는 대기권으로 이루어져있고 그 위엔 우주가 펼쳐져 있으며, 태양을 비롯한 온갖 별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우주가 어떠한 상태로 존재하는 지도 알고요. 그렇다면 이제 신이 차지하고 있던 하늘의 자리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가톨릭 사제이자 천문학자인 크리스토프 게르하르트의 저서 『하느님과 별: 천문학과 신앙, 그 흥미로운 이야기』라는 책을 통해 하늘의 별들과 신의 의미가 어떠한 상관관계를 갖는지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 크리스토프 게르하르트는 1964년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일반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했지만 졸업 후 1987년 독일 뮌스터슈바르작(Münsterschwarzach) 수도원에 입회합니다. 천문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수도자로서 생활하면서도 천문학에 관심을 갖고 아마추어 천문학자로서 수도원에서도 천체 관측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하늘의 별을 그저 관측하는 데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며 느낀 신비와 그 의미를 그리스도교적 영성과 접목합니다. 그의 저서 『하느님과 별』은 천문학과 신앙의 접목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저자는 책에서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천문학의 역사를 간략히 다룬 뒤, 천문학과 종교, 신앙의 연관성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천문학이 인간의 종교적 심성 혹은 신앙과 함께 시작했다는 말과 함께 책의 본문이 시작됩니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별을 보고, 그들 머리 위 하늘에서 밤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이렇게 하늘을 관찰하는 것은 늘 하느님과의 관계와 관련이 있었다. 하늘은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여겨졌다.” 17쪽
이 단락을 시작으로 하여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고대 그리스에서 천문학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발전했는지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고대엔 천문학이 종교적, 사회적, 자연과학적 의미가 뒤섞여 있었다고 말합니다. 고대 인류에게 하늘은 신이 있는 공간이자, 세상을 관장하는 힘이 나오는 곳이었습니다. 태양이나 달과 같은 별 그 자체가 신적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별의 움직임에 따라 세상의 흐름이 결정된다는 식의 ‘예언적’ 성격까지도 천문학에 부여되었지요.
별의 움직임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해졌을 때, 점성술이 등장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면서도 점점 천문학에 관한 과학적이고 물리학적인 접근도 가능해져갔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성경이 천문학을 설명하는 방식은 조금 달랐다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별에 대해 천문학적 관점보다는 하늘 위에 떠있는 별들이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설명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이를 통해 피조물인 자연을 관찰하면서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믿음 때문에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이어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요한네스 케플러, 갈릴레이 갈릴레오 등과 같은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들은 더 이상 지구가 중심으로 하늘이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태양을 주위로 하여 지구를 비롯한 행성들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지요. 하지만 종교권력은 이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맙니다. 여기서 저자의 주목할 만한 주장은 위에 언급한 인물들이 가졌던 천문학에 대한 관심의 동력은 바로 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겐 우주와 세계의 본질을 파악해 나가는 과정이 신앙을 거부하는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저자는 코페르니쿠스나 요한네스 케플러와 같은 천문학자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천문학자에게 신앙은 천문학에 천착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천문학자들은 신학의 부수적 학문인 철학을 공부하며 천문학의 기초를 배웠다.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것은 하느님을 더 깊이 인식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연결 되었다.” 62쪽
물론 저자는 갈릴레오가 재판을 통해 지구가 돈다는 주장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짚고 넘어갑니다. 보통 우리는 갈릴레오가 교회에 의해 재판을 받은 사건을 과학과 신앙 사이에 있는 대립의 대표적 예로 제시하곤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사건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고위 성직자들에게 세계의 본질이나 종교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재판은 형식일 뿐이었다. 본질적으로 권력의 문제가 재판의 결과를 좌우했다. 당시 세계가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교회의 분투였다. 종교나 교회답지 않은 방식이었다.” 79쪽.
또한
“오늘날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기록과 사건의 전후 과정을 살펴보면 교황 우르바노 13세까지 당시 교회 고위 성직자들과 갈릴레오의 관계는 불운한 역사였다. 교회가 세속 권력으로 종교적 주장을 관철한 것은 잘못이며 결과적으로 교회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 갈릴레오에 대한 교회의 판결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92년에야 뒤집혔다.” 81~82쪽
저자는 과학과 신앙을 서로 대립시키거나 서로 떨어뜨려 놓아야만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과학과 신앙은 반드시 대립되고, 상호모순일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과 신앙은 서로 상호보완적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과학은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갖지만 원인과 이유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과학이 제시한 현상을 토대로 그것의 원인과 이유를 되짚어 나갑니다. 저자는 과학과 신앙이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보완적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오히려 극단적인 종교주의자와 극단적인 무신론자 사이엔 공통점이 있다고까지 봅니다.
“신앙을 거부하는 방식은 근본주의 종교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의 방식과 비슷한 특징이 있다. 그들은 이러한 거부 방식에 목숨을 걸고 다른 모든 관점을 거부하며 오류로 판정한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 관해 알려 줄 수 있는 풍요로움을 그들은 알아채지 못한다.” 115쪽
양극단에 있는 이들이 비슷하다는 저자의 견해가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결론에서 자연과학의 한계와 신앙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상호보완적인 영향을 주고받을 때 유의미한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연과학은 단순한 경험이나 추상적인 사고를 논리적 영역으로, 인식 가능한 영역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러나 자연과학만으로는 어떤 것에 대한 가치를 평가하거나 창조와 소멸과 같은 근본적인 의미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 원인과 결과의 상관관계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할 수도 없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저자는 자연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동적으로 우리 마음에 떠오르고 인간존재의 태초부터 제기된 우리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한 매우 오래된 질문이 있다. ‘누가 또는 무엇이 지금의 세계를 만들었나? 어떤 것은 왜 있고, 없는 것은 왜 없는가? 빅뱅의 시작에 무엇이 또는 누가 있었는가? 그 전에는 무엇이었나?’ 이 모든 것은 자연과학적인 질문이 아니라 우리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인간 삶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질문이다.” 122쪽
이 책은 천문학과 우주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신앙과 과학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 무신론자들은 성경이 허구의 이야기로만 가득한 거짓 기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반대로 극단적인 종교인은 과학자들 앞에 성경을 들이밀며 인류의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라고 말합니다. 둘다 아주 어리석은 처사이지요. 성경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컴퓨터처럼 기록한 역사서도 아니고, 신앙에도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은 신앙과 과학이 어떻게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궁금해 하는 분들이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특히 우주론적 창조라든지, 마지막 소멸에 관해 과학적이면서도 신앙의 차원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궁금해 하는 독자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자는 끊임없이 신앙과 과학이 서로 반대하고 있지 않음을 이 책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과학이라는 이성과 논리로서 세상을 탐구하며 현상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오히려 신앙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저자의 견해가 매력적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의 시작을 궁금해 하며, 마지막은 어디로 향할 것이며, 그 모든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신앙과 과학을 서로 덧입혀나가며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란 저자의 긍정적 사고를 책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여전히 과학에서 말하는 창조, 신앙에서 말하는 창조가 어떤 의미를 갖고 어떻게 상호 간에 연관을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을 품고 있는 분들에게 아마 이 책은 새로운 지평을 선사해 줄 것입니다.
“천문학이나 신앙이나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규정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대화하고, 대화 속에서 서로 경청할 때만 인간은 어느 한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양쪽 영역에서 배우게 된다.” 1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