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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말구 Feb 10. 2021

[서평]아무러면 어떤가? 모든 것이 은총이니.

조르주 베르나노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행동에 언제나 확신에 차 있는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 좀 더 나아가 모든 것에 대해 완전한 확신으로 살아간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이긴 할까요? (적어도 제가 아는 한) 합리적이고 건강한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자신의 생각과 행동, 하는 일에 대해 성찰을 하게 됩니다. 지금 과연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는지, 내가 하는 행동들이 선하고 옳은 일인지, 내가 가진 신념이 올바른 것인지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고민하기도 하고,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낄 땐 다 헝클어진 것 같아 좌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고뇌가 신앙의 영역으로 넘어오게 되면 그 밀도가 한층 높아지는 걸 느낍니다. 보이지 않은 하느님, 숨어계신 하느님을 탓하며 신앙에 대해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삶 안에서의 기쁨, 선(善), 배려, 희생과 같은 고결한 가치를 체험하거나 목격할 때는 다시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해 마지않는 마음을 갖기도 하고요. 유한한 인간으로서 무한의 하느님을 체험한다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성찰과 초월을 향한 열린 마음, 계속해서 영적으로 깨어있고자 하는 열망이 있을 때, 하느님과 신앙을 체험합니다.

 지난 2016년, 마더 테레사께서는 성인으로 시성 되셨습니다. 성인은 당신의 삶과 모든 것을 인도의 빈민가에서 사는 이들을 위해 바치셨지요. 성인께서 생전 영적 지도 신부와 주고받은 편지는 『나의 빛이 되어라』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언제나 미소로 빈자와 병자를 맞이하셨던 성인. 하지만 성인의 편지 안에는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어둠, 냉담, 공허가 너무도 커 저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주님께서 제 안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둠, 냉담, 공허의 현실이 너무도 커서 제 영혼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출처: pixabay.com

  비단 성인뿐일까요?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가르침과 비유를 듣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사도들 역시 자신들의 약한 믿음을 고백하며 예수님께 강한 믿음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돌아가시는 순간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하며 고통 속에서 부르짖으셨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크게 느낀 만큼 하느님의 부재(不在)에 대한 고통과 슬픔은 훨씬 더 크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언제나 나약함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더욱 하느님께 믿음을 청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의심과 회의, 실망과 고통 안에서도 묵묵히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한 사제의 모습을 다룬 소설이 떠오릅니다. 프랑스 출신 작가 조르주 베르나노스(Georges Bernanos, 1888~1948)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라는 소설입니다.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현대 프랑스의 가톨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유년시절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소신학교를 다니며 가톨릭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소르본 대학에서 문학과 법학을 전공합니다. 그는 다양한 정치활동이나 현실참여적인 활동을 하면서 소설을 집필했는데, 첫 작품인 『사탄의 태양 아래』를 발표하고서 문단에 이름을 알립니다. 이후 1936년에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를 발표합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이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수상합니다. 그는 소설과 함께 당시 유럽의 정치적 비평들을 많이 쓰기도 했지만 말년엔 여러 가지 정치의 부패와 세력들의 야합에 환멸을 느껴 튀니지로 떠납니다. 이후 그는 간 경변을 얻어 파리로 돌아와 1948년 숨을 거둡니다.

  그의 작품 중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는 20세기 프랑스 문학의 최고의 걸작이자 가톨릭 문학의 정수로 평가되곤 합니다. 특히 이 작품은 반 교권주의와 무신론이 퍼져가던 1930년대 프랑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윤리의식이 옅어지고 있는 사회와 쇄신하려 하지 않는 교회에 대한 비판이 함께 서려있습니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는 말 그대로 시골 본당에 파견된 젊은 사제의 일기로 작품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본당을 맡게 된 젊은 사제는 깊은 신앙을 지녔으나 몸은 약하고 신경과민과 잦은 위장염으로 제대로 된 식사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우직하고, 선한 성품을 지녔던 그는 본당의 신자들을 사랑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순수함과 열정적인 신앙은 폐쇄적인 시골 마을 공동체 사람들에 의해 배척받기 일쑤였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듯해 보이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그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이 소설의 내용은 복잡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젊은 사제가 한 시골 본당에 부임해서 그 본당 사람들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자 처절하게 노력한 기록이자 영적 고뇌의 기록입니다.

  처음 본당에 부임한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내 본당은 권태에 먹혀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 권태가 본당 모두를 우리 보는 앞에서 아귀아귀 먹어 대는데도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언젠가 우리도 그에 걸려들어 몸속에서 암세포를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그것을 속에 지니고도 아주 오래 살 수도 있으니 말이다.” 9p


  여기서 말하는 ‘권태’란 육체적 지루함이나 게으름을 뜻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지루함, 게으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도 이 ‘권태’라는 말로부터 자유로운지 성찰해봅니다. 인간관계의 장(場)으로서의 본당은 활력 있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쇄신하고, 하느님 앞에 나를 내려놓고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자리로서 본당을 생각하고 되돌아보게 됩니다. 내적인 권태는 외적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여도 내면을 점차 와해시킬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서는 장소, 내적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을 마주하는 장소가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외적인 권태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내적인 권태를 경계하는 태도를 기억해봅니다.


  주인공인 젊은 신부는 항상 건강이 좋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신부님의 추천을 받고 한 의사를 찾아갑니다. 그 의사는 젊은 시절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교회에 실망하고 신앙을 잃어갔습니다. 그 의사는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도 않고, 부자들의 비위만 맞추고 있다며 교회를 비난합니다. 또한 교회가 세상의 여러 불의에도 아무 조치도 하지 않는다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의 눈빛에서 어떤 상처를 읽습니다.


  “나는 그의 영혼의 깊은 상처를 드러내는 낌새를 분명 느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그를 설복시키거나 진정시키는 데 필요한 적절한 말을 그때 찾아냈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런 말을 모른다. 대신 인간에게서 나오는 진실한 고통은 우선 하느님께 속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뿐이다. 나는 겸손하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내 마음에 받아 안고 내 것으로 삼아 사랑해 보려 애쓴다. 그럴 즈음 나는 ‘함께하다.’라는 흔해져 버린 표현의 숨은 뜻을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고통에 나는 지금 함께하고 있으니 말이다.” 123p


  주인공은 언제나 겸손한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무언가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함께하려’합니다. 고통을 함께하며 그것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이 모습에서 나약함 속에 깃드는 하느님의 거룩함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강함이나 위대함에서 오는 힘이 아닌, 고통 속에서도 함께하며 주고받는 위로에 대해서 말입니다. 신영복 선생이 말씀하신 ‘함께 맞는 비’라는 구절도 생각이 나는군요. 가난하고 아픈 이들 곁에서 위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모두가 강함으로 떵떵거리고 상대를 복속시키려 할 때, 약함과 위로로 함께 해주는 신앙인의 가치가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출처: pixabay.com

  주인공의 본당 구역에서는 한 백작 가문이 가장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 가족들은 겉으론 그럴듯하게, 자신들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기 위해 살아갑니다. 하지만 안에서는 곪아가고 있는 아픔과 부끄러움이 도사리고 있었지요. 백작은 많은 부정(不貞)을 저질렀고, 백작 부인은 어린 아들을 잃고는 하느님을 부정하고 남편과 딸과의 관계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 집의 딸 역시 그런 분위기 안에서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했고요.

  주인공은 그들이 하느님 안에서 구원되길 바랐습니다. 억지스럽게 한 것은 아니었으나 우연한 기회에 백작 부인과 대화를 나누며 그녀가 회개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명예나 위신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던 백작 부인의 마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신은 아무 죄가 없는 데도 하느님으로부터 고통받고 있다고 말이죠. 그녀의 마음엔 그 어떤 사랑이나 따뜻함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겉으로 위장된 평화만이 그 집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백작 부인에게 자신의 부끄러움을 하느님 앞에 고백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란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우리에게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남겨 주는 과오는 축복을 받을 겁니다. 부인이 자신을 경멸하게 된다면 외려 하느님께 기쁠 일입니다.”

  “이상하기도 한 교훈이군요.”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교훈이 아니지요. 허세나 품위, 허식, 이 모든 것이 썩어 가는 시체를 덮은 비단 염포에 지나지 않는다면 하느님 앞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223p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체를 덮은 비단 염포’에 지나지 않는 것들을 위해 목매달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명예나 위신, 또 나를 감싸고 있는 환경들은 중요합니다. 거기에서 인간은 안정감을 느끼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언제까지 내 손에 쥐고 있을지 생각해보면 조금은 생각이 다르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느님 앞에선 얼마나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갔는지, 하느님 앞에 부끄러울 줄 알았는지, 아프고 가난한 이들을 보고 마음 아파할 줄 알았는지가 명예이자 위신이 될 테니까요.


  주인공은 마음을 다해 사람들을 대하고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오해와 질시 안에서 힘들어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인정받고, 존경받을 만한 행동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오해와 질시 안에서도 그저 사제로서의 분을 다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어 맡겼습니다. 그는 어렵고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데도 다음과 같은 고백을 남깁니다.


  “아무러면 어떤가? 모든 것이 은총이니.” 411p


   이런 확신이 부럽습니다. 이런 신념을 바랄 뿐입니다. 신앙의 신념을 말입니다. 주인공이 받는 온갖 냉대와 질시에도 처연하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이러한 담담한 신앙고백 때문일 것입니다. 때론 고뇌하고, 불안하고, 비극적인 상황 앞에서도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고백이 아름답습니다. 이 아름다운 고백을 조용히 입으로 읊조려봅니다. 따뜻함이 가슴에 흘러들 것을 기대해봅니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는 젊은 사제의 깊은 고뇌의 기록입니다. 신앙인으로서의 고뇌의 기록이기도 하고요. 답답하다 못해 조금은 미련하게까지 느껴지는 한 인물의 신앙을 위한 노력을 따라가며 읽는 것이 이 책의 매력입니다. 마침내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주인공의 고백에 은은한 감동이 몰려옵니다. 겸손과 나약함에 닿는 하느님의 은총의 의미를 이 소설을 통해 다시금 기억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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