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말구 Jun 23. 2020

[서평] 이 세상 모든 종교가 사라지기까지...

로버트 휴 벤슨, 『세상의 주인』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대형서점에 들어갔을 때 말끔히 진열되어 있는 책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구입하고 싶은 욕구를 느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눈길을 끄는 표지 디자인이나 깔끔한 종이 재질들을 볼 때는 더 그렇습니다. 이러니 출판사에서도 마케팅, 디자인에 많은 공을 들이는 것이겠지요.

  어느 날 우연히 서점에 들렀을 때 제 시선을 사로잡는 표지 디자인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얼굴이 큼지막이 박혀 있는 책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대번에 눈길이 갈만한 디자인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교황 얼굴 옆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두 번이나 추천한 책”이라고도 쓰여 있었고요.

  누군가 제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저는 보통 프란치스코 교황이라고 대답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닌 약자에 대한 연민, 정의를 위한 헌신, 권위를 뛰어넘는 소박함은 언제나 저를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프란치스코 교황의 서적들을 자주 읽는 편이고, 신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 편입니다. 그런데 생전 처음 보는 책 제목과 작가의 책에 교황의 얼굴이 붙어 있는 게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리고는 작가가 누구인지 맨 앞장을 넘겨보았습니다.

  로버트 휴 벤슨, 처음 들어 본 이름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는 가톨릭 사제로서 이 소설을 썼다는 간단한 약력이 나와 있었습니다. 지금은 하지 않습니다만, 저는 예전에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소설을 끄적이기도 했습니다. 마침 이 책을 구입할 무렵이 한창 제가 소설을 쓴답시고 시간을 보내던 때이기도 했지요.(제가 가톨릭 사제로서 멋진 소설을 한 편 쓰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는데 저의 필력을 확인하고서 현재는 훗날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가톨릭 사제의 소설, 게다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추천하기도 한 이 책을 고민 없이 집어 들 수 있었습니다.


  로버트 휴 벤슨(Robert Hugh Benson, 1871~1914)은 조금 특이한 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공회 사제였다가 가톨릭 사제로 개종한 사실이 가장 눈길을 끕니다.(성공회 사제에서 가톨릭 사제로 개종한 유명한 사람 중 한명은 존 헨리 뉴먼 추기경(John Henry Newman, 1801~1890)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은 가톨릭으로 개종 뒤에 인상 깊은 신학적 담론들을 제시하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적 초석을 두었다고 평가되는 인물입니다. 지난 2019년 10월 13일 성인품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다른 기회를 통해 이 인물과 관련된 작품도 다룰 예정입니다.)

  로버트 휴 벤슨은 영국 캔터베리의 대주교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캔터베리의 대주교는 영국 성공회에서 최고 수장을 가리킵니다. 성공회의 최고위직 아들로 태어난 아들 벤슨 역시 성공회 사제가 됩니다. 그런데 그는 유럽 여행 도중 성공회의 교리에 의심을 품고 돌연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가톨릭 사제가 됩니다. 성공회 최고위직 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사실은 영국 종교계에 큰 스캔들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개종할 무렵 이미 그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은 저만의 생각뿐일까요.

  로버트 휴 벤슨은 가톨릭 사제가 된 뒤에 사목을 하면서 뛰어난 설교가로 인정을 받기도 했고, 소설이나 희곡, 시, 신학 논문과 같은 집필활동을 병행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세상의 주인』은 후대에 명성을 떨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 조지 오웰의 『1984』(1949) 보다 앞서 나오며, 디스토피아 소설의 길을 처음 열었다고 평가됩니다.  

  로버트 휴 벤슨은 종교계뿐만 아니라 당대 사회에 그의 다양한 작품을 통해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새로운 길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는 안타깝게도 마흔 셋이라는 젊은 나이의 생을 마감합니다.    

  이 소설은 2000년대를 배경으로 한 미래소설입니다. 이 소설에 따르면 2000년에 이르러서 세계는 셋으로 나뉩니다.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이렇게 셋으로 나뉘어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이 셋 사이의 갈등을 잠재운 묘한 인물이 나타납니다. 그가 줄리언 펠센버그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인본주의, 곧 몽매한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뜻이 모였을 때만이 인간의 완전한 발전과 성취가 있을 수 있다는 사상으로 무장한 사람입니다. 그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갈등이 만연하던 세 국가를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고 대통령이 됩니다.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퍼시 프랜시스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가톨릭 사제로서 인간이 지닌 초자연적 본성에 대해 긍정하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살고자하는 인물입니다. 인간 이성이 대답할 수 없는 신앙의 영역에 대해 열려 있는 사고를 지닌 인물입니다.

  세상의 힘을 등에 업은 인본주의는 인간 이성을 마비시키는 종교를 제거하고자 합니다. 이 두 세력의 충돌은 사실 오늘날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집니다. ‘종교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켜 인간 이성의 참된 완성에 장애가 된다는 견해’와 ‘인간은 종교적 심성, 곧 초자연성적 본성을 지닌 존재라는 견해’ 이 두 가지 관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결하고 있지요. 백 년 전에 쓰인 이 소설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이 소설의 주제가 백 년 전의 주제가 아닌 바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주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줄리엔 펠센버그는 세상이 갈등이 아닌 평화로 세상을 하나로 묶고 인류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됩니다. 그는 인본주의를 표방하며 인간의 뜻을 하나로 모았을 때에 인류 세계가 완성을 이룰 것이라 여깁니다. 또한 세상의 갈등은 바로 종교로부터 기인하고 종교가 인간발전을 방해한다고 보는 인물이었습니다. 세계의 갈등을 종식시키고, 하나로 통일한 줄리언 펠센버그는 신비한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있는 장소, 그가 하는 행동들은 모두 비밀리에 진행되었지만 결과는 언제나 평화로움과 일치를 선사했습니다. 그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그를 ‘사람의 아들’, ‘세계의 구원자’, ‘신의 화신’이라 부르며 그에게 열광합니다.

  펠센버그의 관한 묘사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니체의 ‘초인’ 개념이 떠오릅니다. 인간이 지닌 과거의 온갖 허례와 허영을 걷어치우고, 잠재된 인간 이성을 끌어 올릴 수 있는 초인. 그것이 펠센버그를 통해 묘사됩니다. 사람들은 열광하고, 인간 이성의 최고를 마주했을 때 세계는 하나가 되고 더 나음을 향한 장밋빛 미래가 열리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인본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또 다른 인물로는 올리버입니다. 그는 영국 정치가였고, 뛰어난 행정능력과 연설로 줄리엔 펠센버그의 측근이 되는 자리에까지 올라갑니다. 그는 인본주의야 말로 진정한 진리로 받아들이며 종교적 심성이란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진 인물입니다.


  “올리버는 창밖으로 펼쳐진 평화로운 런던 시내를 내려다보며 저 멀리 유럽의 모습까지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유럽 곳곳에서 허황된 이야기로 가득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누르고 상식과 진실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런 세상이 다시 종파니, 교리니 하는 미개한 믿음에 의해 혼돈에 휩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 올리버가 생각하기에 가톨릭교처럼 기괴하고 전염성이 강한 종교는 없었다. 그들은 사람을 순식간에 노예로 만든다. 이런 가능성을 생각하면 너무도 불안했다.”(46쪽)


  이 소설의 작가는 가톨릭 사제입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인본주의자들을 악마의 탈을 쓸 사람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올리버는 다음과 같은 연설로 사람들의 많은 열광을 받았습니다.  


  “올리버는 여기 동상으로 서 있는 위대한 인물을 기리는 뜻깊은 기념일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감사 인사로 연설을 시작했다. … 50년 전에는 가난을 불명예로 여겼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가난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요인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올리버는 50년 전 바로 이날 통과된 개혁안 조항들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그러면서 가는 영광스러운 흔적이며, 동정 받아 마땅한 불운임을 국가의 이름으로 선언했다.”(95쪽)


  올리버의 이 연설을 생각해보면 과연 가톨릭이 인간의 가난에 대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나 생각해봅니다. 교리, 전례, 신비에 매몰되어 삶의 아픔에 눈을 돌리진 않았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초자연적 본성을 지닌 존재라 할지라도, 가난 앞에서는 인간의 생존은 위협을 받습니다. 신앙을 통한 초자연적 진리를 체험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과정입니다. 신앙의 체험, 신비의 체험은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합니다. 그것은 약자의 대한 사랑과 가난한 이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것이 국가의 역할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역할이자 의무임을 새겨보게 되는 구절입니다.

  또한 흥미로운 인물은 올리버의 아내인 메이블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펠센버그를 영웅이자 자신의 정신적 지주로 여기고, 또 남편과 마찬가지로 인본주의가 세상의 진리라 여기지만, 마지막에는 인본주의의 한계를 느끼고 절망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종교적 심성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그녀의 이런 감정은 분명히 진실한 것이었다. 경건한 곳에서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같이, 사제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의 의지로 위대한 인간성을 찬양하고 싶었다. …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본능을 이해했다. 그것을 타락시키고 빛을 어둡게 만들고 생각을 독으로 물들이기는 했지만 인간에게 이런 종류의 의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의식이 없으면 쉽게 약해지는 것이 인간이다.”(215쪽)


  메이블은 인간이 종교적 심성을 지녔음을 어느 정도 긍정하지만 결국 제도화된 종교가 이것을 오히려 방해한다고 여기는 인물입니다. 사실 메이블로 대표되는 유형의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영성, 신비에 대해서는 긍정하나 제도화된 종교는 인간의 탐욕과 권력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여기는 부류가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타락한 종교가 분명히 인간에게 오히려 악영향을 미치고 참된 영성과 신비를 가려버리고 만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소설이 상정한 세상에서는 인본주의, 유물론이 세상의 주류가 됩니다. 따라서 신앙인들, 또는 중세를 대표하는 귀족들은 세상을 거부하는 도시 로마에 모두 모여들었습니다. 그 결과 로마에서는 세상의 흐름과는 정반대의 흐름이 나타납니다. 소설에서 로마는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세상이 꿈을 꾸기 시작하며 포기한 삶을 로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심지어 교회의 화려한 행렬도 부활시켰다. 추기경들은 금박마차를 타고, 교황은 흰 노새를 탔다. 성체는 종을 울리고 불을 밝히며 악취 나는 거리를 통해 옮겨졌다.”(182쪽)


  세상은 악취를 풍기고 있는데 그것과는 달리 교황과 성직자들은 권세를 누립니다. 하느님의 신비, 제도화된 종교는 이 세상과는 달리 거룩하고 이 세상은 그저 비천한 곳에 불과하다는 기존의 그리스도교의 자기 인식을 드러내는 듯합니다.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고 하늘에만 관심을 두는 ‘붕 뜬 신앙’의 표상이 로마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세상의 지도자 펠센버그는 인간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립니다. 그는 세상의 악이자 인류 마지막으로 기생하는 종교가 자리한 로마를 폭격으로 날려버리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합니다. 그 결과 로마는 무너지고 교황을 포함한 대부분의 성직자가 사망합니다. 세상은 그리스도교인들을 절멸시키려 한 것이지요.

  그때 퍼시는 신부에서 추기경이 되어 우연히 영국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퍼시와, 다른 노(老) 추기경만이 살아남고, 다른 추기경들은 모두 사망했습니다. 결국 퍼시가 교황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물론 허울뿐인 교황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시설이나 신자들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홀로 팔레스타인 나자렛으로 떠납니다. 그곳에서 비서 신부 한 명만을 데리고 교황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얼마 남지 않는 신자들과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으며 신앙을 지킬 것을 당부합니다.

  그런데 그때 묘한 일이 일어납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고 오로지 허울뿐인 교황직만 남은 상태, 모든 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던 그때에 진실한 거룩함이 드러납니다. 교황을 보필하던 시리아인 비서신부는 교황이 홀로 집전하는 미사 안에서, 휘황찬란한 장식도, 복잡하며 위엄을 갖춘 예식도 없는 그런 미사에서 장엄한 거룩함을 체험합니다.


  “시리아인은 미사를 올릴 때마다 두려움에 가까운 전율을 느꼈다. 여기 있는 수수한 미사 집전자가 높은 분이라서가 아니었다. 물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제의를 입은 교황 주위에서 뭔지 모를 기운이 느껴졌다. … 마침내 그가 움직여 성혈을 드러내고 손을 뻗어 성작을 들어 올렸을 때는 마치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사제는 충격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358~359쪽)


  이렇게 진정한 종교적 체험, 신앙의 체험은 고요한 곳에서, 소박한 곳에서 이뤄질 수 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 내려오신 곳이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허름한 마굿간이었음을. 세상의 악과 죽음을 이긴 곳이 휘황찬란한 왕좌가 아니라 비참한 십자가 위에서 였음을 기억하게 해줍니다. 외적이고 시각화된 거룩함이 내면의 울림을 주는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면의 거룩함이 완성에 이르게 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교황이 조용히 홀로 미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며 자신을 영적으로 압도되는 모습 역시 우리의 한 부분 일 수 있습니다. 단순히 미사 드리는 모습뿐만 아니라 드넓은 자연 앞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세상의 아름다움 앞에서 경외를 느끼고 압도당하는 경험도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경험은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이뤄지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나만이 홀로 있을 때, 홀로 마주 할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경외심 앞에 결코 닫혀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사실 위 내용 안에는 이미 소설의 많은 줄거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결론까지 모두 말씀드린다면 스포일러가 될까 결론을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 이 책의 구성은 단순합니다. 인본주의를 표방하는 세계와 가톨릭을 따르는 종교 세계의 대결입니다. 이것은 정신적 대결이자, 인간 의지의 대결, 나아가 폭력의 대결이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지향을 지닌 집단 간의 갈등입니다.

  이 소설을 통해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폭력으로서의 승리가 완전한 승리를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폭력으로서 승리를 쟁취했을지라도, 패자의 희생과 무고한 죽음은 그 어떠한 이성으로도 설명하기도 납득하기도 어렵습니다. 인간 이성의 승리이건, 종교의 승리이건 그 과정이 폭력이 되었을 때는 그 누구도 승리라 단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은 종교인이건, 비종교인이건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분들이 읽었을 때 마음의 울림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생각이던 간에 완전함을 표방할 수는 없습니다. 유한성을 지닌 인간이 스스로가 자신만이, 자신의 집단만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완전히 담지하고 있다는 확신에서 비극이 초래됩니다. 이 단순한 이치를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이 책을 통해 오히려 진리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마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에도 두 극단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인간 이성을 앞세워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해결 할 수 있다는 환원주의적 사고가 있을 것이고, 반대로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도 않은 행동들을 앞세운 종교 극단주의자들도 있습니다. 또한 서로를 합의에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갈등의 원인은 누가 옳고 그르냐에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갈등의 원인은 자신의 한계나 유한성을 깨닫지 못하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이나, 자신의 집단의 한계를 인정할 수 있는 태도야 말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성적 탐구’, ‘종교적 신비’를 그저 막연하게, 상대적으로 받아들여, 좋은 게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분명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받아들이고, 옳지 않음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는 과정 안에서 모두가 완성을 향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인 것이지요.  

  ‘종교를 믿자, 믿지 말자.’, ‘종교가 기능적 측면에서 효용성이 있다, 없다.’를 주장하기 위해 이 책을 읽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가치에 대한 인정과 받아들임. 포용과 포섭이 인간 내면의 성장을 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분들이야 말로 이 책을 읽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서평] 그럼 결국 희망을 찾지 못했다는 말이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