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허우잉, 『시인의 죽음』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가 좌절을 느낀다는 것은 무언가를 희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 받기 싫으면 아무것도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마.’하는 조언도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마음이 상처 받았을 때면 ‘그래, 차라리 기대를 하지 말지.’하고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우도 많고요. 특히 신뢰나 확신이 컸던 대상으로부터 받은 실망이나 배신감은 상처가 되어 쉬이 아물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 부모에게 받은 상처, 가장 가까이 여기던 친구의 배신, 소속감이나 일체감을 깊이 느끼던 단체로부터의 배척 같은 것들 말입니다.
문제는 믿었던 대상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예 세상을 보는 눈을 다르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 회의감을 품게 되고, ‘사람이란 믿을 것이 못 돼’, ‘세상에서 믿을 건 오직 나뿐이야’하며 더 이상 마음을 열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엔 이러한 상처가 훗날 범죄를 일으키는 씨앗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목격하기도 하지요.
안타깝게도 우리는 상처를 경험합니다. 그 상처가 크건 작건 말이죠. 내가 믿었던 대상의 실체가 결코 믿을만한 대상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라든지, 내가 원치 않은 상황에 휘말려 들어가 자신이 모함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면 아주 작은 단순한 오해로 촉발된 사건이 있을 수도 있고, 주변 상황이 내 의지와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물론 나 자신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요.
주변에 우리에게 상처를 줄만한 일들을 피할 수 없다면, 문제는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느냐’이겠지요.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면 그것이 곯아버려 내면의 상태는 점점 심각해집니다. 다행히 요즘은 심리치료, 심리상담과 같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다양한 과정들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심리학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도움을 받습니다. 이렇게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결국 다시금 세상을 긍정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무언가 희망할 수 있게 이끌어주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라는 가치가 마음을 영영 떠나지 않게 붙들어 매는 것. 이것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자 목적은 아닐까요.
이번에 함께 나누고 싶은 책은 다이허우잉의 『시인의 죽음』입니다. 다이허우잉이라는 작가는 우리에게 『사람아 아, 사람아』로 가장 잘 알려진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신영복 선생님께서 번역하셨기에 더욱 유명세를 타기도 했을 것입니다. 신영복 선생님 특유에 간결하고도 명확한 문장이 소설의 호소력을 덧입혔지요. 저는 누군가 상처 받고, 마음을 아파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톨스토이의 『부활』과 다이허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 이 두 권을 주저 없이 추천할 것입니다. 인간이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처절한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람아 아 사람아』를 읽은 뒤에야 다이허우잉이란 작가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집어 든 책이 다이허우잉의 처녀작 『시인의 죽음』입니다.
다이허우잉(載厚英, 1938~1996)은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여류작가입니다. 그녀는 중국 안후이 성의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상하이에 있는 화둥 사범대학 중문학부를 졸업한 뒤, ‘상하이 작가협회 문학연구소’에서 문학 활동을 합니다. 그녀는 젊어서 ‘반우파 투쟁’에 아주 적극적이었다고 합니다. 국가에 대한, 공산당에 대한 충성 때문이었습니다. 우파로 몰린 아버지로 인해 공산당원으로 인정을 받지도 못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녀를 더욱 공산혁명에 몰두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이허우잉이 속한 ‘상하이 작가협회 문학연구소’와 같은 기관은 당시 문학의 사상검증을 하는 역할도 했나 봅니다. 그녀는 국민당 첩자로 몰려 우파로 낙인이 찍힌 원지에(聞捷)라는 사람의 시(詩)를 심문합니다. 이때 다이허우잉은 원지에의 사람됨과 시에 매료되어 사랑에 빠져 그와 결혼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당은 둘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원지에 와 다이허우잉은 둘 다 우파로 몰려 갖은 고초를 당하고 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로 원지에는 자살하고 맙니다. 이 사건이 이번에 다룰 소설 『시인의 죽음』의 모티프입니다. 다이허우잉의 자전적 소설인 것이지요.
이후 다이허우잉은 맹목적 이념 아래서 인간성을 잃어가는 사회를 꼬집는 소설들을 출간합니다. 인간성이라는 가치야말로 참된 희망이 될 수 있다는 ‘휴머니즘’을 보여주면서 말입니다. 이념에 매몰되어 인간성을 잃어가는 사회에 대한 경종입니다. 이에 그녀는 중국 문학계에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권력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문학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성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고자 하는 문학 작품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휴머니즘 문학의 기수’라는 별명을 갖게 됩니다.
그녀는 1996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하는 데, 본인의 자택에서 자신이 아는 제자에게 피살당했습니다. 범인은 다이허우잉의 집에 몰래 물건을 훔치러 들어왔다가, 집에 돌아온 그녀를 보고 우발적으로 살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파란만장했던 삶입니다.
소설 『시인의 죽음』에서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합니다. 국가와 공산당에 충성을 다 하는 인물, 자신의 권력 쟁취를 위해 왜곡된 충성을 하는 인물, 남들을 고발하며 자신의 이익을 얻는 인물, 권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두려워 고분고분 따르는 인물, 억울한 누명으로 제대로 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인물, 국가와 당에 충성을 다했지만 당을 구성하던 사람들이 허위와 위선에 감싸여 있었음을 깨닫는 인물. 800페이지에 달하는 긴 소설 안에서 다양한 인물들과 사건들이 유유히 흘러갑니다.
주인공 ‘샹난’은 어렸을 때부터 당의 교육을 받고, 당이 자신을 키워줬으며, 당에는 오류가 없을 것이라 믿으며 커왔습니다. 나름 능력을 인정받는 그녀에 대한 주변에 시기도 있었지만 그래도 당은 틀리지 않을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반동 혐의가 있는 우파 시인 ‘위쯔치’를 심문합니다. 그가 쓰고 있던 시 『끝없는 장강 물결 도도히 흘러』가 우파 혁명을 선동한다는 혐의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만나고, 그의 대화를 들을수록 그에게서도, 시에서도 전혀 책망할 것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의 인간됨에, 그의 시에 매료됩니다.
샹난의 뜻과는 달리 상부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위쯔치를 고발할 구실을 찾습니다. 어렸을 대부터 당의 교육을 철저히 받아온 샹난은 위쯔치의 죄목을 찾아내지 못하자 오히려 애꿎은 자신을 책망합니다.
“이제부턴 더 ‘좌’로 가야겠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날 이후 그녀의 마음은 갈수록 더 공허해졌다. 자기한테 비판당해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양심’이란 녀석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수시로 꿈틀댔다. 그녀는 회의했다. …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를 비판하고 부정하면서 혁명의 조류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써 왔다.” 87쪽.
위쯔치를 만난 후 샹난의 마음속엔 ‘양심’이 꿈들 댑니다. 옳은 것을 향한 인간의 본래 마음이겠지요. 하지만 샹난은 그럴 때마다 ‘자기비판’을 해왔습니다. 세뇌란 이토록 무섭습니다. 올바른 것과 올바른 것의 기준이 자신의 것으로 소화되지가 않습니다. 외부의 잣대로 선과 악을 구분해 버립니다. 자신의 마음이 선을 향하고 있더라도, 외부의 강력한 기준이 악을 향하고 있다면 ‘자기비판’을 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런 합리적 의심이나 사고 없이 외부의 기준을 자신의 내면에 끌어들이고 만다면 더 이상 자유와 양심은 자리할 곳이 없습니다. 그 외부의 기준에 벗어나지 않기 위해 끝없는 자기 검열에 늪에 빠져 홀로 설 수가 없게 됩니다.
이처럼 절대적인 하나의 기준만을 답으로 놓고 사람을 재단해버리고 마는 형국이니,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며 자신이 올바르다는 것을 드러내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부모를, 자신의 아내나 남편을, 자신의 이웃을 거리낌 없이 고발합니다. 조금이라도 당에 충성하는 것 같지 않은 행동을 보이면 ‘반동분자’라는 올가미를 씌워버리는 것이지요. 소설에서도 자신이 인정받고, 승진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내나 이웃을 거리낌 없이 고발해버리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샹난은 이념과 인간의 욕심이 뒤섞여있는 현실을 마주하고 혼돈스러워합니다. 당은 오류가 없는 무결한 곳이라 생각하는데도, 점점 자신의 양심은 다른 시선과 사고를 요구합니다. 타인을 고발하며 자신의 욕심을 채워나가는 인물들을 보게 될 때는 더욱 그랬습니다. 샹난이 친구에게 편지를 보낸 대목입니다.
“하지만 당은? 당은 어디에 있는 거지? 베이징에? 그렇게나 먼 곳에? 설마 내가 베이징까지 가야만 이 영혼의 씨앗을 봉헌할 수 있다는 얘긴 아니겠지? … ‘잡귀’과 함께 어울리면서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따뜻함을 느꼈어. 전에는 이 ‘잡귀’들과 접촉할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이제야 그들을 이해할 기회가 생긴 셈이야.” 267~268쪽.
여기서 ‘잡귀’란 반동 혐의를 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일종의 불순분자이지요. 샹난은 위쯔치에게서 아무런 잘못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반동 혐의의 올가미가 자신에게 씌워졌습니다. 평생을 당을 위해 살아온 샹난에게는 고통스러웠지만 여전히 당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잡귀’들과 어울리면서도 그들을 줄곤 무시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지내며 마음이 점차 변해감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따뜻함’이었습니다.
샹난은 인간의 시기와 질투가 이념이라는 탈을 쓰고 인간에게 덤벼든다는 것을 점차 깨달아 갑니다. ‘대의’라는 명분 뒤에 숨어 자신의 ‘간사함’으로 다른 이들을 좌지우지한다는 것까지도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위쯔치와의 사랑을 키워나갑니다. 마침내 그들은 결혼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당 상부에서는 그들의 연애와 결혼은 반동 혁명의 시작이라며 결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당의 간부인 리용리라는 인물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리용리는 모든 인간관계는 다 계급 관계이며, 따라서 모든 인간의 결합 역시 정치적 결합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이나 연애도 물론 예외는 아닐 것이다. … 그렇다면 두 사람의 결합은 ‘대(大) 자산 계급’과 ‘소자산 계급’, ‘대(大) 수정주의’와 ‘소수정주의’의 결합인 셈이다. 이런 결합의 정치적 기초는 두말할 것도 없이 반동적이다.” 539쪽.
결국 당에서는 샹난을 멀리 다른 곳으로 배속시키고, 위쯔치의 미완성 시 『끝없는 장강 물결 도도히 흘러』를 근거로 그를 고발하며 반동 혐의를 뒤집어씌웁니다. 위쯔치는 사랑도, 시도 인정받을 수 없는 현실에서 좌절합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진심과 결백, 그리고 거짓 권력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자살을 택합니다. 샹난에게 이 사건은 자기 자신과 당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버리는 계기가 됩니다. 온갖 권모술수에 의해 위쯔치와 자신이 비난과 모욕을 당하고 위쯔치는 목숨까지 끊어버렸으니 말입니다. 샹난은 분노합니다.
“아주 무서운 현실! 그건 우리 모두의 모든 것을 계급투쟁 속에 포함시키고 독재의 특 안으로 끌어넣는 거야. ‘전면 독재’의 현실 속에서 사람들의 자유는 모조리 박탈되고 말아. 연애나 결혼도 계급투쟁의 일부이자 수단이 되어 버렸지. 그러니까 이른바 혼인의 자유란 것도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거야. 얼마나 소름이 끼치는지! 난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외치고 싶어. 우린 사람이다! 우리에게 휴머니즘과 인정과 인간성을 제발 좀 베풀어 달라!” 716쪽.
샹난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린 사람이다! 우리에게 휴머니즘과 인정과 인간성을 제발 좀 베풀어 달라!”하고 소리칩니다. 인간으로서 가진 자유, 양심, 사랑, 애정이 결핍된 채 오로지 이념과 계급이라는 껍데기만이 남은 시대에서 작가가 남기는 포효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권리를 사회가 박탈해버리고만 현실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위쯔치는 죽어버렸지만 샹난은 이웃들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그동안 권력이 두려워 옳은 말을 하지 못했던 이들도 위쯔치의 죽음이 사악하고 간사한 자들의 술수로 인한 억울했던 것임을 증언을 통해 밝혀줍니다. 인간다움이 모두 박탈된 그 끝에서 많은 인물들은 다시 ‘인간다움’을 회복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소설 『시인의 죽음』은 작가 다이허우잉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본인이 겪은 비극을 다뤘지요. 이 소설이 매력적인 것은 비극을 다루면서도 저 밑에서는 무언가 ‘희망’ 혹은 ‘인간애’와 같은 따뜻한 느낌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전부이자 모든 것이던 당이 인간적인 따뜻함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걸 깨닫습니다. 당의 권력자가 된 어렸을 적 친구도 자신을 이용할 궁리만 했습니다. 주인공에 투영된 작가는 분노와 비판으로 소설을 마무리 짓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사랑’과 ‘자유’, ‘양심’을 찾습니다. 그리고 ‘희망’을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작가와 주인공이 자기의 아픔과 슬픔, 고통을 ‘인간성의 회복’으로 승화시킵니다. 인간다운 인간 안에서 희망이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됩니다.
앞서 모두 다룰 수는 없었지만, 이 소설을 통해 이념의 절대화와 철저한 통제 아래 살아가야 했던 수없이 많은, 다양한 군상의 인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고뇌와 나약함을 볼 수도 있고, 그 안에서 인간성을 보존하려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념이 인간성을 집어삼켜버렸을 때 오는 비극을 우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야 말로 가족과 형제, 이웃을 이념으로 재단해버린 우(愚)를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념이 그어놓은 우리 마음의 상처는 그대로인가 봅니다. 하지만 작가 다이허우잉은 그래도 인간에게 희망을 걸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을 통해, 진심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끝없는 분노로 자신을 파멸 해갈 것이 아니라 사랑과 진심이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시인의 죽음』이란 작품은 비극적 사건으로부터 발생한 자신의 상처를 ‘휴머니즘’으로 승화시키는 작가의 울림을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해줍니다. 그 과정이 처절하고도 고통스럽지만 이내 인간 안에서 다시 희망을 되찾는 모습이 감동적을 전해줍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로, 누군가로부터의 아픔을 간직한(아마 모든 분들이겠지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상처와 아픔 안에서도 다시 희망을 찾아낼 수 있다는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분노와 비난은 자기 파괴로 귀결되기 십상이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 안에서 그것이 잘 해결되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요. 하지만 오히려 그때 다시 인간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과 신뢰가 남아있는 인간을 바라보며, 여전히 그 안에 희망이 움트고 있음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