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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명찰 12

by 마르코니

조영미와 신진철을 같은 대학 동아리에서 만났다.

서로 사랑했고 같은 미래를 약속했다. 세 살 연상이었던 진철이 먼저 대학을 졸업하고 미래건설 신입사원 공채로 입사했다. 경영학을 전공한 진철은 건축 자재를 수급하는 구매팀에 배치되었다.

경기는 날이 갈수록 호황이었다. 이에, 미래건설도 성장 궤도에 올라탔다. 자고 일어나면 신규 계열사가 출범했다. 이를테면 토목공사 사업부는 미래토건, 플랜트 수주 사업부는 미래엔지니어링으로 사업부가 계열사로 승격하여 분사하는 식이었다.

사업부장을 맡은 이사는 사장으로, 부장은 이사로, 줄 승진을 했고 신입사원도 물밀려들 듯 충원되었다.

진철은 영민한 두뇌에 눈치도 빨랐다. 그 점이 오창식 부장의 눈에 띄어 계열사 분사 TF 참모진으로 발탁되었다.

오창식 부장은 42세로 미국의 MIT에서 건축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아 온 엘리트 중 엘리트였다. 미래건설에 입사 후 초특급 승진을 거듭해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미래그룹 컨트롤 타워에서 오창식을 차기 계열사 사장으로 점 찍어 둔 것은 구매팀의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다만, 오창식이 비교적 나이가 젊다는 점에서 다른 임원들의 사기를 꺾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부장 직급에 체류시켜 놓고 급여만 올린 채 암묵적으로 임원 승진을 미루고 있었다.

그래도 수완이 농간을 부려 직함은 그대로 부장이지만, 실제로는 '예비 사장님'이었다.

진철은 신입사원답지 않게 여러 방면으로 유능했다. 그리고 의욕도 흘러넘쳤다. 어떤 일이든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이해했다.

오 부장은 진철을 향해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경영학부를 졸업한 진철은 건축의 기본적인 설계와 공정 지식이 전무했다. 그러나 오 부장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덕분에 업계의 동향과 건축 계통의 최신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업적이 될만한 일거리를 죄다 진철에게 몰아주었다. 진철은 그 떡밥을 놓치지 않고 밤낮없이 업무에 매진했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미래건설 구매팀은 미래산업으로 분리되어 건축자재 공급업체로 새롭게 창설되었다. 미래그룹 수뇌부의 약속대로 오 부장은 초대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오창식 사장은 진철을 미래산업 경영전략실 실장으로 영입했다. 그의 실질적인 업무는 오 사장의 보좌역이었다. 실장은 부장급으로 대우받았다. 그 무렵 진철은 대리 직급이었다.

그러니까 대리에서 몇 단계 건너뛰고 부장으로 전례 없는 승진을 한 것이다.

이는 진철이 오 사장의 총애를 받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 향후 경영진으로 승격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뜻했다.

미래산업이 분리되기 전에는 미래건설에 종속되어 자재를 공급하는 일개 부서에 불과했다.

하지만 별개의 계열사로 출범한 이후 타 건설사에 거래선을 뚫어 매출 영역이 대폭 확대되었다. 기존 업무에 큰 변화 없이 규모만 성장한 형태였다.

시멘트 구매부, 내장재 구매부 등 세부적인 부서가 사업부로 차례로 명칭이 바뀌었다.

미래건설 인근에 새로 올린 고층 빌딩으로 사업장을 이전하는 등 약간의 변화도 있었다.

진철은 회사에서 성장 궤도를 달리는 동안 영미를 만날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영미는 진철을 십분 이해했다. 진철의 출세가 곧 자신들의 미래라고 믿었다.

진철이 격무에 시달리는 만큼 연봉은 상승했다. 그리고 약속했던 결혼은 반복적으로 미루어졌다.


"이번 프로젝트만 마무리 짓고."

"사장님께서 새로운 숙제를 주셨어."

"자기야. 나 피곤하니까. 다음에 이야기하자."


진철이 회사에서 성장하는 만큼 영미는 멀어해졌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사랑했다. 결혼에 대한 마음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진철이 시간이 없는 관계로 데이트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영미는 진철에게 동거를 제안했다. 서로 만날 시간이 없기에 집에서 시간을 보내자는 아이디어였다. 영미는 뒷바라지도 감수겠다고 말했다. 진철의 반응은 대환영이었다.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영미는 학교 졸업을 한 한기 남겨두고 휴학계를 냈다.

최선을 다해 진철을 내조했다. 어차피 둘은 곧 결혼할 예정이었다. 따라서 흉이 될 것도 없었다.

그러다 영미는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 무렵 진철은 프로젝트에 치여 신경 쓸 게 많아 보였다. 기쁜 소식이지만 좀 미루고 진철이 여유가 있을 때 알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This is a work of fiction. Names, characters, places and incidents either are products of the author’s imagination or are used fictitiously. Any resemblance to actual events or locales or persons, living or dead, is entirely coinciden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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