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남은 스물두 살에 불과했다. 시대적 정서를 감안한다면 낯선 남자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계남에게 꽤나 떨리는 일이었다.
윤경식씨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 사는 김계남이라고 합니다.
펜팔이 처음이라 떨리네요.
사실 편지 쓰는 것 자체가 처음이랍니다.
블랑 잡지에 실린 경식씨의 글을 보았습니다.
좋은 펜팔 친구가 되길 기대하며 글을 올립니다.
주소가 강원도로 되어 있으시던데, 거긴 많이 춥지 않으세요?
서울은 너무 춥네요. 아무쪼록 건강히 잘 지내세요.
기회가 된다면 또 펜팔이라는 걸 해보고 싶네요.
계남은 몇 번의 망설임 끝에 편지를 우체국에서 부쳤다.
그리고 기다리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일에 치여 살던 계남은 편지를 보낸 사실조차 서서히 잊고 있었다.
보름이 지났을 무렵, 답신이 도착했다. 계남은 보낸 사람의 이름을 보고 뛸 듯 기뻐했다.
편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서울 사는 계남씨에게
안녕하세요?
계남씨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윤경식입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저도 편지를 처음 받아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남씨를 알게 되어서 아주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왜냐고요? 계남씨는 마음씨가 따뜻하신 분이라서 그래요.
강원도가 춥지는 않냐고 걱정하셨을 때 감동을 받았거든요.
서울 사람은 깍쟁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어요.
계남씨 같은 따뜻한 분도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어요.
먼 곳에서 나를 걱정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실 거예요.
그리고 맞아요. 강원도는 정말 춥습니다.
저는 평생을 강원도에만 살아서 다른 곳은 얼마나 따뜻할지 도통 알 수가 없지만요.
봉식이가 아파서 읍내로 병원을 갔었어요.
결핵인가 뭔가 하는 지독한 병에 걸려서 한 달 넘게 병간호를 했어요.
그때 병원에 있던 잡지를 읽었고 뒤편에 펜팔 모집 광고를 발견했어요. (잡지에 붙어있던 엽서를 몰래 오려낸 것은 비밀입니다.)
아, 참. 봉식이가 누구인지 궁금하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봉식이는 저의 동생입니다. 봉식이 말고도 동생들이 많아요.
저는 동생들이 아주 많아서 행복합니다.
곧 있으면 우체부 아저씨가 오실 시간이라 이만 줄이는 게 좋겠습니다.
계남씨에게 한시라도 빨리 답장을 붙이고 싶은 마음만 가득합니다.
건강하세요. 그리고 답장 기다릴게요.
윤경식 올림.
계남은 경식의 유쾌한 편지를 읽고 웃음을 터트렸다.
게다가 자신의 편지를 받고 기뻤다고 말했다. 계남은 얼른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내 글을 적었다.
계남의 마음속에 연애 감정이 피어올랐다.
경식씨.
안녕하세요.
답장 잘 받았습니다.
저의 편지를 받고 감동을 받으셨다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그나저나 동생이 쾌차했는지 궁금합니다.
경식씨도 한 달이나 병간호를 하시느라 고생하셨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경식씨의 근심을 모두 헤아릴 수 없겠지만,
대략적이나마 어떤 심정일지 이해가 됩니다.
저도 동생이 셋이나 있거든요.
동생 얘기를 하다 보니 마음이 숙연해지네요.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그리고 경식씨를 위해 기도드리겠습니다.
반드시 좋은 일이 잇따를 거예요.
김계남 올림.
얼마 후 계남에게 수신된 경식의 편지에는 사진이 동봉되어 있었다.
계남씨.
잘 지내셨죠?
저를 위해 기도를 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어쩐지 일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다 계남씨 덕이었군요.
봉식이는 지난주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아이의 힘든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여간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끝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갔어요.
부디 고통 없이 가길 기도했던 제 염원을 하나님께서 들으셨길 바랄 뿐입니다.
이제는 좀 유쾌한 얘기를 하고 싶어요.
어젯밤에 우리 집 강아지 덕실이가 새끼를 7마리나 낳았답니다.
식구가 갑자기 일곱이나 늘어버려 걱정이기 하지만, 아이들은 신나서 웃고 소리치고 난리였습니다. 아마 그 모습을 계남씨도 보셨으면 정말 즐거워하셨을 겁니다.
계남씨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은 힘을 얻습니다.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의 빛나는 청춘을 위해!
추신 –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 사진을 동봉합니다. 너무 추남이라고 흉보실까 걱정이 앞서지만, 이 윤경식이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궁금하실 계남씨를 위해 용기를 내봅니다.
계남은 사진을 보고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계남은 경식을 시골 촌놈으로 넘겨짚었다. 단정한 양장을 입고 가르마를 탄 머리를 타고 있었다.
그날 이후 경식에 대한 마음은 더욱 깊어만 갔다. 봉식과 그의 동생들을 생각하면 한편으로 측은한 구석도 있었다.
둘은 이후로도 몇 번의 편지 교환이 더 이어졌다.
편지 교환이 누적될수록 계남의 호감은 더욱 깊어졌고, 경식 또한 같은 마음일 것이라 믿었다.
그의 편지에는 늘 사랑의 속삭임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계남은 지옥 같은 삶에서 겨우 벗어났다. 이제 진정한 사랑까지 찾게 되었다. 너무도 따사로운 나날이었다.
그런데 이맘때면 왔어야 할 편지가 소식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계남은 불안했다.
평균적인 주기에서 열흘을 훌쩍 넘기고 경식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는 미안하다는 말을 시작으로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평소와 다른 문체에서 그의 슬픔이 묻어났다.
계남씨에게
많이 기다리셨죠?
미안해요. 그동안 일이 생겨서 편지를 못했어요.
하루빨리 상황이 해결되어 계남 씨에게 편지를 쓸 수 있게 되길 기도했어요.
저는 사실 고아원에 살고 있어요.
갓난아기 때 부모님께 버려져 여기로 오게 되었답니다.
그래도 부족함 없이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사랑으로 길러 주셨어요.
저는 다 큰 성인이 되었지만, 아직 어린 동생들이 눈에 밟혀 줄곧 여기서 생활하고 있어요.
사모님께서 3년 전에 소천하셨거든요. 그 충격으로 목사님께서도 쓰러지셨고, 3년째 거동이 불편하세요.
우리는 염소를 길러 생계를 이어갑니다.
생계라고 표현하는 것도 민망하네요. 겨우 입에 풀칠 정도만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막내 아이가 열이 불덩이같이 나서 입원을 했어요.
병원 측에서 지난번에 밀린 돈이 많아 일부라도 지급하지 않으면 치료를 이어갈 수 없다고 했어요.
저는 급한 마음에 공사판에 뛰어들었다가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저까지 드러눕게 되었어요.
저의 삶은 왜 이렇게 고단할까요?
하나님께 야속한 마음만 가득합니다.
쓰다 보니 하소연만 잔뜩 늘어놓았네요. 미안해요.
계남씨와 편지를 주고받는 게 저의 유일한 희망이자 즐거움이었거든요.
아이들이 또 싸우고 있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 답장이 늦어지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계남씨는 항상 제 가슴속에 있습니다.
늘 행복하세요.
경식 올림.
계남은 눈물이 났다. 그토록 밝은 사람이 저렇게 힘든 일을 감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다. 심지어 아이들에게 이 똥통 같은 세상의 등불이 되어 주고 있었다.
자신의 허리를 망가뜨려 가며.
이 바보 같은 남자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계남의 행복을 빌어주고 있었다.
꽃 한번 펴보지 못한 청춘이 코흘리개 아이들에게 휩싸여 젊음을 헌신한다는 게 분했다.
그리고 그깟 돈 몇 푼으로 어려운 사람에게 엄포를 놓은 병원의 부도덕함에 계남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계남은 서랍에서 편지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그깟' 돈을 아주 왕창 집어 두툼하게 밀어 넣고 펜을 들었다.
경식씨.
힘드실 텐데 기운 내셨으면 합니다.
제가 항상 응원하고 있습니다.
길게 적을 시간도 아까웠다. 계남은 우체국까지 전력으로 내달렸다.
"제일 빠른 걸로 보내주세요."
This is a work of fiction. Names, characters, places and incidents either are products of the author’s imagination or are used fictitiously. Any resemblance to actual events or locales or persons, living or dead, is entirely coinciden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