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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레MARE Dec 28. 2023

서로를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으려면

 로버트 던바는 한 사람이 안정적으로 유지 가능한 인간관계를 150명으로 어림잡았다. 그가 정의한 인간의 던바의 수(Dunbar's number)는 평균 150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5명의 소울 메이트, 15명의 절친, 50명의 좋은 친구, 150명의 친구까지가 보통의 사람이 감당 가능한 사회적 관계라는 가설이다. 내가 올해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사람을 헤아려보면 가까스로 150명을 채울 수 있을 것도 같다. 친구가 150명이 아니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사람이 150명이다. 그중 친구라고 할만한 사람을 헤아려보면 50명도 안되지 싶은데. 피로도에 비하면 생각보다 적은 숫자다. 여기에 고릴라의 던바의 수가 50이라는 사실을 덧붙이면, 더 골치가 아파진다. 딱히 인간관계를 감당하는 것이 수월하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던바의 150이라는 숫자는 일반론이 아니라 특수론이 아닐는지.


 백아절현. 춘추시대의 이름난 거문고 명인 백아는 자신의 음악을 잘 이해해 주는 벗이 죽자, 거문고 줄을 끊었다. 세상에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제대로 아는 자가 없으므로 더 이상 연주 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 인(人)이라는 한자도, 두 사람이 기대어 있는 모양새라고 했던가. 이해받지 못하면, 나의 면면들을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사람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문득 백아의 던바의 수가 궁금해진다. 그가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벗을 둘이나 셋 두었다면 거문고 줄을 끊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니까 말이다. 던바의 계산법은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는 평생에 몇 명의 진정한 친구를 곁에 둘 수 있을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몇이나 되어야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을지 고민해 본다. 따지고 보면 숫자가 문제가 아니지 싶다. 개인은 다면적이다. 그 모든 면면의 조각들은 담길 그릇이 필요하다. 친구가 100명이라면 100개의 그릇에 나눠 담을 수도 있고, 서넛 뿐이라면 그에 맞게 나누면 된다. 요는 반드시 누군가가 껴안아줘야만 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담기지 못한 조각은 나를 아프게 찌르고 파고든다. 얼마나 아프냐고 묻는다면, 누군가는 사람을 잃고 거문고 줄이 아니라 목숨을 끊는 일도 있다고 답하고 싶다.


친구-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표준국어대사전). 잘 알고 좋아하는 사람, 하지만 보통 가족이 아닌 사람을 이르는 말; 적이 아닌 사람이나 믿을만한 사람(케임브리지 사전 Cambridge Dictionary: Friend-a person who you know well and who you like a lot, but who is usually not a member of your family; someone who is not an enemy and who you can trust). 하지만 어떤 인연은 만난 순간부터 친구다. 많은 것을 알지 못해도, 딱 한 가지만 맞아도 친구라고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도 친구라고 믿어보기도 한다. 적으로 시작했지만 친구가 되기도 하고, 친구로 시작했지만 적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친구의 정의는 모호하고 마음먹기 나름이며 때로는 억지에 가깝기도 한 것이 아닐까. 그런 지점에서 백아는 고지식해 보인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친구라고 불러볼 수 있었을 텐데. 친구를 잃은 그는 새로운 벗은커녕, 거문고라는 남은 벗 마저 끊어낸 것이다. 누구보다 자신의 음악을 잘 알아주었던, 죽은 벗을 향한 경의를 표하는 데에 온 힘을 다한 결정이다. 그 결단력은 감탄할만한 것이지만, 친구도 예술도 모두 퇴장한 황무지에서 인생을 어떻게 꾸려나갈 요량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일로 만난 사람에게 우리 정도면 친구 아니냐는 농담 반 진담 반인 말을 던졌다가, 상대를 당황시킨 일이 있다. 상대는 나를 그저 일터에서 만난 나쁘지 않게 합이 맞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을 뿐, 친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탓이다. 친구라고 인정받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연인이 되는 것보다 어렵다. 친구관계는 오늘부터 1일이라는 낯간지러운 선포와 함께 헤아려지는 경우조차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서로 알게 된 지 어언 몇 년이며 어떤 시간들을 함께 했는지 돌이켜보는 일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누군가와 신뢰를 주고받고, 서로를 친구라는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일은 진실로 귀하고 고마운 경험이다. 그래서일까, 친구보다는 가족이 우선이고, 결혼을 하거나 연인이 생기면, 일이 바빠지면 친구는 뒷전이 되기 마련이라는 말은 참 아쉽다. 사실은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것은 친구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일부다. 함께 전시를 보러 다니며 예술에 대해 이야기했던 친구를 끊어내면 예술을 사랑하는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책에 대한 감상을 공유하던 친구를 멀리하면 독서를 향한 열정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친구를 떠나는 일은 그에게 보여준 나, 그에게 이해받던 나를 떠나는 것과 같다.


 사람은 자국을 남긴다. 진하게 남긴다. 친구에게 이해받고 사랑받았던 나의 면면들을 갑자기 어느 날부터 가족에게, 연인에게, 자식에게, 일터에서 이해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친구가 떠나고 나면 생기는 그 빈 공간이, 그 공허가 나를 항상 벅차게 했다. 그런 이유로 내가 누군가를 먼저 떠나는 일은, 한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작은 갈등이 생기거나 조금 마음이 상해도, 같이 걸은 시간들을 되새김질하고, 그 친구에게 이해받은 나의 면면들을 떠올리거나 친구의 장점을 정면으로 다시 바라보면 우리는 여전히, 너무도 친구다. 그렇게 10년이 넘은 친구들이 8명 즈음, 쌓인 세월은 적어도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10명 안팎이다. 나의 대부분은 이 18명의 친구들과 가족들, 친척들에게 담겨있다. 던바의 수가 겨우 고릴라 정도밖에 되지 않아도 충만하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던바의 수가 늘어나면, 더 많은 사람에게 나를 이해받고 나면, 더 충만한 삶이겠지. 누군가가 떠나더라도 빈자리가 작게 느껴지겠지. 그러면 백아처럼 거문고 줄을 끊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최근 반년 가량은 던바의 수를 늘리겠다고 열심히였다. 해가 지날수록 좁아지는 인간관계가 아쉽다는 이유에서다. 유난하게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했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를 내보기도 했다. 아쉽게도 던바의 수는 소폭 상승했을 뿐, 획기적으로 반등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난 반년 간 나의 이야기를 매일 이해받을 수 있었다. 매일매일 얕고 짧은 공감과 이해가 있었다. 그 짧은 순간들은 깊고 넓은 이해로 발전하기도 했고, 그냥 그 순간에만 머물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백아처럼 좁고 깊은 관계에 몰두해 왔던 나에게는 큰 깨달음이었다. 그것이 찰나에 머물더라도 최선을 다해 이해받고 이해할 것. 그것으로 만족할 것. 이전에는 나의 많은 것들을 이해받아야만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친구라고 불러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고릴라보다는 던바의 수가 커야 기분이 나아질 것 같으니, 어쩌면 올해 내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눴다고 여기는 150명을 친구라고 불러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들 역시 나를 친구라는 같은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다.


- 당신이 누군가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친구라고 불러볼 수 있기를 바라는, M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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