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은 작은 벌레만 보면 질색팔색을 한다. 거미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올해의 벌레왕으로 꼽힐 법한 러브버그, 심지어 날벌레만 봐도 피해 다니기 일쑤다. 그런 아들을 보며 난 되묻는다. "네 손짓 하나에 목숨이 왔다갔다 할 벌레가 널 무서워할 일이지, 저 벌레보다 수십만 배 몸집이 큰 네가 무서워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이냐."
이렇게 핀잔을 늘어놓긴 하지만, 사실 내 아들의 행동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사리에 맞는 조처다. 인류는 약 300만년 전 처음 등장한 이후 농업혁명이 시작된 1만 년 전까지, 수렵·채집 생활을 해왔다. 인류 역사를 100년으로 압축한다면 99년 이상을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아온 셈이다.
숲에서 채집하고 수렵하며 살아가던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일까. 힘이 센 짐승들은 그만큼 눈에 잘 띄어 상대적으로 다루기 용이했을 것이다. 훨씬 더 두려웠던 존재는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고, 잘못 다뤘다간 우리 목숨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것들, 즉 벌레들이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인간 목숨에 위협이 될 만한 것들은 대부분 제거됐거나 멸종됐지만, 당시엔 '맹독충(蟲)'들이 가장 두려운 적들이었을 것이다.
농업혁명 이후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류는 먹이사슬의 슈퍼포식자(superpredator)로 거듭났지만, 아직 우리 몸 속 DNA에는 벌레에 맥없이 당한 기억이 새겨져 있다. 사회의 발전 속도와 DNA 적응 속도의 불일치가 장난감 총보다 뱀 인형을 더 무섭게 만드는 '원인 인자'인 셈이다.
이 '원인 인자' 탓에 현대적 인간이 오해하고 있는 무서움은 벌레 말곤 없을까. 유발 하라리의 책 <호모데우스>엔 이런 문구가 나온다.
"2012년 전 세계 사망자 수는 약 5,600만 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62만 명이 폭력으로 죽었다.(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12만 명, 범죄로 죽은 사람이 50만 명이었다.) 반면, 80만 명이 자살했고, 150만 명이 당뇨병으로 죽었다. 현재 설탕은 화약보다 위험하다."
폭력으로 죽는 사람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더 많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당뇨병으로 죽는다. 인류 역사 최초로 많이 먹고, 덜 움직이는 게 문제가 된 세상이 된 것이다. (물론, 지구의 한 편에선 여전히 굶어 죽는 비극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는 쌀의 부족 문제가 아니라, 분배의 불평등 문제다.)
먹고사는 것에 대한 무서움 역시 벌레를 대하는 감정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가난에 대한 두려움은 사회의 발전 속도와 DNA 적응 속도의 불일치가 만들어 낸 감정적 오해는 아닐까.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가난 그 자체가 아니라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어려움에 잠식돼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 것이 아닐까.
사업이 맘처럼 되지 않는 요즘이다. 이럴 때마다 가난에 대한 무서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굴복당하지 않으려 발버둥친다. 오늘의 글은 이 발버둥이 만들어 낸 흰소리로 봐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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