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집에 와서 손 발 씻고 아내와 바톤터치해서 아들이랑 놀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내가 아빠라니. 아들이 있다니. 신기하다 신기해.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아침 혹은 새벽에 아들이랑 둘이 기상해서 거실로 나온 다음 비몽사몽에 물 한 잔 마시고 아들한테도 빨대컵을 쥐어주고 열심히 물을 먹는 아들을 멍하니 볼 때. 출장으로 외박하는 날 아들 자기 전에 영상통화하고 나서 가만히 혼자 누웠을 때. 엄마 아빠는 관심도 없이 혼자서 이것저것 하고 이리저리 뒹굴거리며 노는 아들을 볼 때. 왠지 아들을 살짝 떨어져서 보는 느낌이 들면서 난데없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아들이 생겨서 처자식과 함께 사는 이 상황이. 초기 6개월은 아주 자주 그랬고 20개월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빈도는 점점 낮아지고 있지만.
아직 아빠라는 역할이 완전히 몸에 배지는 않은 모양이다. 어느 날은 아들이랑 뒹구는 게 당연한 듯이 아무런 위화감이 없다가도 어느 날은 아빠라는 내가 어색하다. 나는 아직도 아내랑 친구들이랑 술 먹고 노는 게 좋은 철부지인데. 처자식을 책임질만한 사람이 되었나. 아들 녀석이랑 나랑 수준이 비슷한 것 같은데(...).
가끔씩 생각한다. 이 녀석이 없었으면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특히 아내의 모습을 보면 그렇다. 안 그래도 뒷전인 남편을 저 멀리 밀쳐내고(...) 아들에게 찐 사랑을 뿜어내는 우리 최대주주님. 10년이 넘도록 옆에 붙어있었지만 10개월 뱃속에 품고 있던 녀석에게 밀린 거다. 아들의 존재뿐만 아니라 이 녀석이 바꾼 아내의 모습까지도 비가역적인 느낌. 상투적인 표현으로 억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게 자식인가 보다. 아들 키우는 게 고단한 순간이야 많이 있지만 이 녀석이 없던 시절로 돌아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살아온 기억을 더듬어보면 일종의 깃발을 꽂아놓은 자리가 있다. 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기회, 다시 되돌리기 아까운 성취의 순간이 그렇다. 어렵게 병역특례 자리를 구했을 때, 4개월 구애 끝에 아내와 연애를 시작한 날 밤, 운 좋게 수능을 잘 보고 나온 오후, 이런 순간들에 깃발이 꽂혀있다. 이 깃발들은 가끔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때 일종의 세이브 포인트로 여겨진다. 지나간 일들에 대해 후회나 아쉬움이 있을 때, 아 그때로 돌아가면 새로 잘해볼 텐데, 이렇게 해보면 재밌을 텐데 하는 거다.
아들이 나오고 나서 이 깃발들은 전부 리셋되었다. 아들이 나오기 전 혹은 생기기 전으로 절대 돌아가고 싶지가 않다. 얘는 이전에 꽂아 놓은 깃발과는 성격이 다르다.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하라고 하면 병특도 구할 수 있을 거 같고 우리 아내도 다시 만날 수 있고 수능도 다시 잘 볼 수 있을 거 같다. 쉽지는 않겠지만 하려면 해볼 수 있다. 다만 힘겹게 다시 하기 부담스러울 뿐이지. 그런데 짠짠이는 아니다. 이 녀석이 생기기 전으로 돌아가면 이 녀석을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을까? 설사 임신을 한 시점으로 돌아가더라도 바로 이 녀석이 다시 나올까? 다른 거는 내 노력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데 이 녀석은 아니잖아. 나는 이 녀석이 정말 맘에 들어. 바꾸고 싶지가 않다. 그 전의 과거로 절대 가고 싶지 않아.
사회인이 되고 나이가 들면서 가진 것도 늘고 못 가진 건 더욱더 늘어나니 걱정도 후회도 잦아진다. 가령 그때 아파트를 샀어야 하는데 혹은 비트코인을 샀어야 하는데 같은(...) 이런 세속적인 것들이 날 괴롭히곤 했는데 아들이 태어난 시점 이전의 모든 일들은 깨끗하게 미련이 사라졌다. 오히려 그 모든 과거를 긍정하게 된다.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으면 혹시라도 지금 우리 아들을 못 만났을 수도 있잖아?
내가 아들을 만나기 전까지인 34년 4개월이 모여서 이 녀석을 만났다고, 하나라도 달라졌으면 이 녀석이 아닐 수도 있었다고, 그러니 잘 살아온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이 얼마나 강력한 정신승리인가. 아들이 인생에 있어 일종의 편집점이 되어준다. 이 녀석이 내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갈지는 아직 모르지만 내 과거는 확실히 최선으로 자리매김시켰다. 과거의 후회나 실패는 모두 이렇게 털어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 있다. 이 아들 녀석 덕분에. 이제 처자식과 열심히 신나게 재밌게 잘 살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