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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의 바다 Apr 25. 2024

스위치백을 걷고 있는 인생에게

Bryce Canyon National Park, Utah



더위가 한 풀 꺾인 저녁, 우리는 나바호 루프 트레일(Navajo Loop Trail)을 걸었다. 뜨거운 한낮에 도착해서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해는 넘어가서 시원해졌다. 낮동안 더운 기운에 찌뿌둥해진 온몸이 움직이고 싶어 근질거렸다.


건조한 모래바닥은 사각사각했다. 보호난간이 없는 길 끝은 낭떠러지였다. 나의 딸과 내가 나란히 걷기에 딱 맞는 길폭이었고, 체격이 남다른 남편은 혼자 걷는 게 안전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내가 절벽을 한 발짝 옆에 두고 걷는 일은 아찔함 그 이상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내 눈이 볼 수 있는 한 저 멀리까지 가득 차 있는 후두(Hoodoo, 침식작용으로 생긴 뾰족한 돌기둥)의 아름다움에만 집중했다.


어느 순간부터 길은 지그재그 모양이었다. 스위치백으로 내려가는 흙길은 운동 신경이 둔한 나의 몸이 평소에 잘 쓰지 않는 고도의 기술을 시연하게 했다. 딸이 안전한지 그녀의 발걸음까지 신경 쓰느라 진땀이 났다. 비가 온 뒤 질퍽해진 땅에 신발을 망가뜨리는 그 진흙이 지금 간절히 생각났다. 현실은 내 운동화 아래 서걱거리는 모래알이 바퀴가 되어 나는 아슬아슬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점점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근육이 움직이는 걸 느꼈다. 호흡이 빨라지고 있었다. 근육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무서움을 극복하고 있었다. 두 팔을 날개처럼 쫙 펼치고 다리에 힘을 빼고 각도가 주는 속도에 나의 몸을 내맡긴다면, 도약하다가 휘익 날아오를 것 같았다. 노스캐롤라이나주 키티호크 모래 언덕에서 첫 비행에 성공했던 라이트 형제가 떠올랐다.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 기쁨으로 빛이 나는 내 자신을 느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주변 소음은 옅어지고 동굴 속에 있는 듯 아늑해졌다. 숨소리마저 마이크를 댄 듯 크게 들렸다. 돌기둥은 점점 높아졌으며 나무들도 점점 커졌다. 그리고 우리는 차츰 작아졌다. 후두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대 높이에서 출발하여 돌기둥 속을 지그재그로 파고 들어간 셈이다. 이제는 우리가 후두를 한참 올려다보아야 그 끝을 볼 수 있을까 말까였다.


이 낯설지 않은 느낌이 뭔지 알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결국 스위치백이라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살면서 굴곡진 길을 계속 만나게 된다. 모퉁이를 돌면서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라보지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을 지나가며 숨이 차오르고 어지럽고 멈춰 쉬고 싶을 때도 있다. 지치고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기도 한다. 도대체 급경사는 언제 끝나는지 알 수도 없다. 평지를 걷고 싶지만 아주 멀리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계속되는 급커브 길을 안전하게 가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왔던 길을 한번 되돌아본다면, 멈춰 돌아볼 용기가 있다면,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얼마나 멀리 왔는지 깨닫게 된다. 끈기로 내디딘 한걸음 한걸음이 모여 얼마나 아름다운 길이 되었는지 알게 된다. 인내의 순간들이 모여 반짝이는 나날로 추억될 것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고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어디서 시작했는지
기억하고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면 된다.








지그재그 고갯길은 나에게 더 이상 힘들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서걱거리고 건조하며 미끄러워 위험한 흙길은 더 이상 없었다. 황금빛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처럼 황금으로 빛나는 보드라운 흙길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후두 무리 속 저 깊은 곳에서 하나의 점으로 머물러 있다가 스위치백으로 유유히 걸어 나와서 우리는 다시 사람 크기로 돌아왔다.


우리의 영혼은

좀 더
진해지고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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