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quoia National Park, California
내가 살던 동네, 큰길로 나가는 골목길 끝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거대하고 고고했다. 울타리가 있어서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신기하고 신령스러웠다. 세상 그 어떤 소음도 그 선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 당시 내가 아는 한, 나의 주변에서 그 나무보다 더 오랜 세월 살아있는 생명체는 없었던 것 같다. 어른들은 그 나무가 우리 마을의 안녕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그곳을 지나갈 때면 어린 나이에도 나는 꼭 멈춰 서서 한동안 그 나무를 바라보았다.
수천 년을 버텨온 세콰이어 나무숲에서 나의 어릴 적 동네 당산나무가 생각났다. 그 한 그루의 나무는 어린 나에게 초연함을 알려주었고. 지금 세콰이어 무리는 어른이지만 개미 크기가 된 나에게 초자연을 말하는 듯했다. 2천 년 이상 살아있다는 건 과연 어떤 것일까. 그들은 병이 들거나 쇠약하지 않았다. 아름드리 몸통은 건실하고 초록잎은 무성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이 듦’에 대한 일부 정의가 그들에겐 들어맞지 않았다.
세콰이어에게 묻고 싶어졌다. 나이가 들어가는데도 어떻게 하면 그리 단단할 수 있는지. 살면서 만난 수많은 역경을 어찌하면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는지. 그 오랜 시간 무엇이 그대를 살아가게 했는지. 그리하여 그대의 삶에 어떤 의미가 살고 있는지.
반백년도 채 못 살았지만 이리도 지쳐가고 있는 나에게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해달라고 매달리고 싶었다. 동동이의 알사탕이 간절해졌다. 백희나 작가의 책 <알사탕> 에서 동동이는 문방구에서 사 온 알사탕을 먹고 반려견 구슬이의 마음도 듣고, 돌아가신 할머니의 목소리도 듣는다. 나도 그런 사탕을 살 수 있다면 좋겠다. 운이 좋으면 초록색 알사탕을 입에 물고 세콰이어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지도 않을까.
세콰이어 국립공원 소개 리플릿에는 ‘불‘이 키워드였다. 물도 햇빛도 아니었다. 세콰이어 나무의 재생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불이었다. 불은 작거나 중간 크기의 나무들을 없애서 자연화재의 위험을 줄이고, 어린 세콰이어가 잘 클 수 있도록 충분한 햇살이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준다고 했다.
나의 숲을 들여다본다. 나는 어린 세콰이어처럼 햇빛을 잘 받으며 건강하게 자라고 있을까. 새로운 사고가 자유롭게 자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어른 세콰이어처럼 단단하게 자라고 있을까. 어정쩡한 크기의 편견이나 고집이 자라나는 것도 모른 채, 햇빛이 비집고 들어 올 자리도 없이 숲을 방치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의 숲에는
단단한 뿌리를
땅에 내리고
우뚝 서있는
튼튼한 세콰이어가
몇 그루 살고 있을까.
나는 국립공원 파크 레인저가 되어 나의 숲을 찬찬히 둘러보고 마침내 ‘불’을 처방한다. 나이 들면서 내가 좀 더 잘 안다고 생각한 거만함, 얄팍한 지식으로 내가 맞다고 믿는 것만 보는 편협함, 수시로 눈에 띄는 후회의 미련함 따위가 어정쩡한 크기로 자라나고 있었다. 더 크게 자라기 전에 미리 태워야 하지 않겠냐고, 자뭇 진지한 표정으로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세콰이어 나무 아래 서서 눈을 감고 상상한다. 밝은 긍정, 은근한 겸손과 강렬한 포용력 같은 태양 빛이 한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그런 아름다운 여백을 품고 있는 나의 숲이라면. 굳건하게 잘 자라는 나무들이 의연하게 서있는 나의 숲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