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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의 바다 Dec 16. 2024

네 자릿수의 뺄셈



가을의 끝이었다. 강렬히 불타오른 잎들을 떨쳐내 버린 나무들 사이로 걸었다. 도로 위 자동차들은 을씨년스러운 바람을 맞으며 지나갔다. 폐 속 깊숙이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흐린 하늘에 뽀얀 입김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아침이었다.








상진철교 위로 기차가 지나갔다. 단양강 잔도길을 막 걷기 시작할 때였다. 얼마 전 남편은 저 기차 안에 있었다. 서울로 향하는 이른 새벽, 차창밖으로 이곳을 처음 알아보았고, 집으로 향하는 늦은 밤에 꿈을 꾸듯 이곳을 내려다보았다고 했다. 적막, 평화, 아름다움, 이런 단어들을 나열하며, 그가 내 손을 이끌고 직접 찾아오기까지 2달이 걸렸다.


험한 벼랑에 선반처럼 달아내어 만든 잔도(棧道)는 멀리서 보기에 아찔했다. 1만 개의 골짜기와 1천 개의 봉우리, 만학천봉의 깎아지른 절벽은 굽이굽이 새로운 얼굴로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는 듯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여 커다란 입을 벌린 것 같은 석회동굴이 암벽 어딘가에서 나타났다. 도담삼봉 등 단양의 다른 지질명소와 더불어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곳이었다.


고소공포가 있는 나로서는 데크길이 얼마나 높은 곳에 달려 있는지, 구멍 뚫린 철망 바닥이 얼마나 자주 나타나는지 신경 쓰일 법도 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억겁의 시간을 간직한 기암절벽을 마주 보는 남한강의 잔잔함에, 세상 모든 소음을 집어삼킨 듯한 고요함에, 내 시선은 오로지 푸른 강을 향해 있었다.





초록빛 강물은 시간이 멈춰 있었다. 모든 것이 빨라야 하는 현대 사회에 이곳은 속해있지 않았다. 휙휙 지나가는 짧은 영상의 유혹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이곳은, 느리게 긴 장면 하나로 나를 끌어당겼다. 오묘한 비취색의 남한강은 쓸쓸한 하늘을 고스란히 담아 애달픈 빛이 났다.


멀리 보이는 소백산줄기는 높다고 자만하지 않고 하늘 아래 겸손했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자태가 꼭 이곳이어야 했다. 강물에 비친 겹겹의 산등선은, 어릴 적 미술시간 물감을 짜 넣은 색종이를 접었다 펼치면 나타났던 데칼코마니였다.


수면 위로 비친 세계는 흐린 하늘의 아련한 구름까지 똑같았다. 기차가 지나가는 철교가 있고, 가파란 절벽에 구렁이같이 구불거리는 잔도가 있었다. 모든 게 빈틈없이 똑같은 평행 세계에서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수평선 아래에는 나를 찾을 수 없고, 수평선 위에는 나를 볼 수 없었다. 나는 어느 세계에 속해 있는 걸까, 아니면 그 어디에도 있지 않은 걸까.








최근 종영한 드라마 <조립식 가족>에는 아빠와 아이들이 밥을 같이 먹는 모습이 많이 나왔다. 어느덧 성인이 된 아이들이 독립해서 나갔을 때, 시끌벅적했던 밥상이 조용해졌다. 여유가 생겨 느긋해진 아빠가 나는 왜 적적해 보였을까. 자녀가 떠난 뒤 부모에게 찾아오는 외로움을 나는 왜 이제야 알아보게 되었을까.


21살의 여름방학 때, 고등학교 친구를 동네 도서관에서 마주쳤다. 학교 앞에서 혼자 자취한다는 친구가 부러워 친구 자취방에서 방학을 보낼 계획을 짰다. 옷가지와 공부할 책을 무겁게 챙기고 야심 차게 집을 나갔다. 열심히 공부하고 오겠다는 나의 결심을 부모님은 별말 없이 허락해 주셨다.


친구에게 생활비를 주었으나 우리 집이 아니었다. 밥을 제때 먹지 못했고, 빨래방에서 말린 옷은 이상하게 낡아 보였다. 몸살처럼 배가 시름시름 아프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쓰러졌다. 병원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2주 동안 뾰족했던 마음이 금세 편안해졌다. 침대에 엎드려 책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오만 원 지폐가 눈앞에 나타났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빠가 검지손가락을 세워 입에 대고 미소 짓고 계셨다. 나도 소리 내지 않고 웃었다. 풀이 죽어 돌아온 딸이 안쓰러워 건넨 아빠의 마음은 우리만의 비밀이 되었다. 한겨울 붕어빵 같은 아빠의 따스함이 나를 다시금 일으켜 세웠다.


취직을 하고 처음 독립을 하면서 25살의 나는 마냥 설레었다. 인생의 전환점에서 두근거렸고, 내가 없을 우리 집 밥상의 허전함은 안중에도 없었다. 매일 아침 엄마가 깨워줘야 일어났던 내가 시계 알람소리에 스스로 일어나고, 엄마가 챙겨주던 밥만 먹던 내가 직접 요리해서 밥을 먹었다.


부모님은 나를 너무나 기특해하셨지만, 빈자리의 서운함에 관한 어떤 표현도 하지 않으셨다. 나를 늘 걱정하며 응원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나는 고작 사회생활의 고됨이 내 속에 차오르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무지하게도 계속 몰랐다. 내가 엄마가 되고도 지금까지.





나의 인생은 네 자릿수의 뺄셈이었다. 나는 작은 수인데 큰 수를 빼야 하는 도전이 끊임없이 주어졌다. 부모님은 나에게 10을 계속 빌려주셨다. 나는 그들의 내리사랑으로 삶을 헤쳐나갔다. 내가 일의 자리에 있을 때 부모님은 십의 자리에서, 내가 십의 자리일 때 부모님은 백의 자리에서. 받아 내림으로 나는 여기까지 왔다.


수면 위 물그림자가 부모님 마음처럼 애처로웠다. 자녀가 성장하여 독립하는 것을 기뻐하면서도 눈물짓는 마음 같았다. 소백산이며 절벽이며 하늘의 구름까지 고스란히 비춰주는 마음이, 자녀를 있는 그대로 보듬어주는 무한대의 사랑이었다. 잔잔한 물결에 마음이 흔들리고, 스산한 바람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구름 뒤에 숨어있던 태양이 나타나 강렬한 빛을 내고 있었다.








딸아이가 학교 간 사이 남편과 둘이 온 길이었다. 돌아갈 시간이 빠듯했으나, 강물은 빨려드는 갯벌처럼 나의 발목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한 무리의 원앙이 푸드덕 날아와서 차분한 물그림자를 깨트렸다. 물 위에 그려진 동그란 파장이 사라지고 다시 고요의 거울이 될 때까지, 우리는 잔도 끝에 서 있었다.





드라마 <조립식 가족>에 요리하는 아빠가 있었다. 칼국수 식당을 운영하며 새벽에 국수 반죽하러 갔다가도 집에 와서 아이들 아침밥을 챙겨 주었다. 고생스러워 보였지만 본인의 행복이라고 했다. 행여나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이 갈까 싶어 길바닥에 침도 못 뱉는다고 했다. 아이들 덕분에 본인이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나에게 육아는 네 자릿수의 덧셈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사랑이 내게로 왔다. 딸아이는 멈춤 없이 1을 올려주었다. 나는 그녀의 올림사랑으로 초보엄마의 삶을 헤쳐나갔다. 아이가 일의 자리에 있을 때 나는 십의 자리에서, 아이가 십의 자리일 때 나는 백의 자리에서. 받아 올림으로 나는 여기까지 왔다.





푸른 남한강에는,

가슴 한 편 저며오는 사랑이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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