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플래쉬'를 선보였던 데미언 채츨의 작품이라기에
데미언 채츨은 하버드 대학교 출신인 1985년생 감독이더군요. '위플래쉬'를 보면서 처절하게 꿈을 향한 몸부림을 표현해낸 그의 열정이 섬뜩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모호한 느낌을 떨칠 수 없게 했던 라스트 씬의 의미.......
그는 '할 이야기가 많은 젊은이인가보다' 상상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해 보쟈면, 주인공 앤드류는 꿈을 향한 열정은 있으나 그저 평범하고 소극적인 케릭터라고 할까요?! 초반전 씬에서 아버지와 함께 영화관에 갔을 때 팝콘에 건포도를 넣어 먹는 아버지에게 아무 말 없이 순응합니다. 나중에 본인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왜 말하지 않았냐' 물으니 '그냥 피해 먹으면 된다'고 대답하죠. 그랬던 앤드류가 플랫쳐라는 괴물 같은 스승을 만나 학대라 부를 수밖에 없는 조련을 받으며 드러머로서의 성공을 위해 본인의 모든 것을 던집니다. 우여곡절 끝에 카네기홀에서의 공연 장면, 플랫처는 앤서니에게 드럼을 부탁했고, 그러나 본인을 학교에서 쫓겨나게 했던 앤서니에게 복수라도 하듯이 그가 준비하지 않은 곡을 연주합니다. 할 수 없이 무대에서 내려간 앤서니는 잠시 후 다시 등장하여 스스로의 곡을 열심히 연주하며 다른 악기들이 맞 추도록 하고, 플랫쳐 또한 거기에 맞춰 지휘하죠. 허나 영상에 비춰진 플랫쳐의 표정, 커튼 뒤에서 바라보던 앤서니 아버지의 표정은 뭔가 꺼림직한 느낌을 줍니다.
'라라랜드', 또한 음악 영화라는데 데미언 채츨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나 궁금해 지더군요.
라라랜드란 의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땅이라네요. LA의 애칭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영화는 뮤지션으로서 그리고 배우로서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고 이끌어주지만 꿈을 위해서는 함께 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고, 상연되지 않은 영화처럼 가정을 이루었다면 하고 상상되는 장면들이 펼쳐집니다.
30대 초반의 감독에게 꿈을 이루기 위한 열정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일 것이고, 그리하여 본인 나이에 어울리는 표현을 참 멋지게 하는 감독임에 틀림 없습니다.
요즘 C.G.융의 분석심리학에 푹 빠져지내다 보니, 그가 그리도 중요시한 중년기 이후에나 무의식 세계 저 깊이 있는 자기(Self)를 향한 자기실현의 과정이 진행된다니, 30대 초반의 데미언 채츨은 자아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할 나이인거죠.
외부를 바라보는 자는 꿈을 꾸고
내면을 바라보는 자는 깨어난다
C.G.융이 이야기 했듯이 열심히 꿈을 향해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융은 또 이야기했죠.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두 가지 화학 물질이 접촉하는 것과 같다. 어떤 반응이 일어나면 둘 다 완전히 바뀌게 된다
융 이론에 의한 인간의 내면을 형상화한 도형입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내면으로의 여행이 중년 이후에 가능하다 했으니, 공자의 '40세가 불혹'이라 한 의미와 통한다고도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그의 무의식에 의식 세계의 대극을 모두 가지고 있으니, 남성의 무의식에는 아니마란 여성성이 있으며, 여성 또한 아니무스라는 남성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두 남녀가 첫눈에 반했다 함은 서로의 내면에 있는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만났다는 의미라고 풀이합니다.
30대의 데미언 채츨은 본인의 길을 열심히 걸어가는 멋진 감독임에 틀림 없다고 여겨지는 이유네요. 그가 융이 말한 다음과 같은 존재 자체에
빛을 밝히는 인물이기를.......
'당신이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 이것이 인생의 시금석이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한, 인간 실존의 유일한 의미는 존재 그 자체의 어둠속에 빛을 밝히는 것이다
좀더 쉽게 이야기해 보쟈면,
오늘 아침 신문에서 본, 우리 시대의 어른 97세 노철학자 김형석 교수님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겠죠.
Q : 100년 가까이살아보니 느낌이 어떠신가요?
A : 오래 살아보니 더불어 살았던 때가 행복했던거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짐을 내가 대신 져준 기억이 행복하게 오래 남습니다. 사랑이 있는 고생은 의미 있게 남는다고 할까요?!
Q : '영원'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 종교와 실존철학(윤리, 역사)에서 모든 과제가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사는데 그 결과가 영원과 일치하면 역사에 남고, 시간으로 끝나면 역사에서 시라진다는 것입니다. 영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지성적이고 고독한 사람은 영원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