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UX Writing Lab Nov 28. 2019

느린 아이를 소개합니다


“아이는 엄마 하기 나름”이라는 신념에 따라 아이를 키웠다. 학원과 사교육으로 무장하고, 아이의 일정을 짜주고, 진도, 숙제를 확인하는 행동도 이런 신념에 의거한 것이지만, 아이의 자율성과 행복을 보장해야 한다는 반대편의 육아계에도 이 신념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매일 책을 읽어 주면 어느 날 책을 줄줄 읽을 줄 알았다. 격려해주고, 칭찬해주면 자신감이 넘쳐나는 아이가 되는 줄 알았다. 도전을 응원하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로 자라는 줄 알았다. 실수를 너그럽게 인정하면 어떤 일이든 쉽게 포기하지 않고 악착같이 해내는 집념을 갖게 될 줄 알았다. 아이의 자율권을 중요시하는 육아 현장에서도 아이가 엄마의 노력에 걸맞는 능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비수 같은 말과 맞닥들여야 한다. “엄마의 노력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래.”







난 숨가쁘게 돌아가는 대한 민국 사회에서 살아온 것이 용할 정도로 늦된 사람이다. 새로운 트렌드를 좇아가지 못해 항상 허덕거렸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데 경쟁에서 어필할 줄 모르니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인정을 받지만 느리고 분위기 파악못하는 사람이라는 오명을 몇 달, 혹은 몇 년을 겪어야 했다. 느리고, 기다리는 분야에서는 대한민국의 사람 중 평균 이상이라 자부할 수 있다. 어떻게 격변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고 살아왔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하지만 아이를 기르자 느린 속성이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라는 걸 깨달았다. ‘급하지 않아’, ‘기다리자’, ‘그렇구나’, ‘잘 할 수 있어’... 믿고 기다리는 것이 비교적 할 만했다. 



엄마도 느리지만 아이도 만만치 않게 느렸다. 느린 엄마조차 ‘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시기를 훌쩍 뛰어넘어서도 마땅히 기대한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 장애가 있는 건 아닐까,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일반적인 발달 속도보다 훨씬 느리게 진행되는 아이를 보며 초조함이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언어. 사회성, 신체의 느린 발달만이 답답함의 원인은 아니다. 미숙한 상태를 못견뎌서 새로운 것을 무조건 회피하려 한다.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잘 안되면 금새 실망한다, 더 이상의 시도를 거부한다. 친구들과 있어도 따로 떨어져 혼자 있으려 한다. 다른 사람에게 지적받거나 배우는 걸 거부해서 발전이 느리다. 감정이 예민하고 사소한 것도 대범하게 넘길 줄 모른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내가 방향을 잘못 잡은 걸까? 성취 지향의 대한민국에서 아이의 느린 면을 이야기하는 자체가 상당히 부끄럽다. 일단 느린 아이들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적극적이고 빠르고 명랑한 아이들의 이야기만 들린다. 가정에서 내 아이만 키우다 보니 다양한 아이들의 면모를 볼 기회가 없기 때문에 대중의 담론이 정상적인 기준인 것처럼 느껴진다. 학창시절 목표 점수를 정해두고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 공부를 했던 것처럼 빠르고, 명랑 쾌활한 아이라는 기준을 세워놓고 아이를 그 기준에 맞춰보려고 여러 조언들을 실천했다. 그러나 아이는 점수를 올리는 것처럼 쉽게 기준에 맞춰지지 않았다. 기준에 맞추는 데 성공한 성공담은 들리는데 실패담은 들리지 않는다. 실패담이 궁금했고, 실패한 원인이 궁금했는데 누구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이럴 때는 책이 최고다. 많은 경우에 책이 해답을 제시했다. 육아서, 심리서, 교육서를 뒤적였다. 아이 어린 시절 조언자나 멘토없이 대한민국 경쟁 사회에서 아이의 가능성을 믿고 사교육에 휩쓸리지 않고 엄마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팔 할은 책 덕분이라 할 수 있지만, 내 기억으로 아이의 늦되고 덜떨어진 면을 옹호하는 육아서는 기억이 없다. 



늦된 아이들이 현실에 상당히 많이 존재할텐데 이상하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가끔 의학적으로 주의력 결핍, 아스퍼거 증후군과 같은 이야기가 들리고, 뇌치료, 언어 훈련, 약물 치료로 해결한다는 말이 들리지만 이것은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다. 분명히 아이의 늦된 측면을 바라보는 효과적인 관점이 있으리라. 하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내향적이고 소극적이고 늦된 모습은 ‘잘못된’ 모습으로 언급되고 있었고, 허심 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친구나 조언자가 없다. 혼자서 속이 타들어갔다. 



모든 육아 멘토들이 “기다려라” “모든 아이는 천재다” 라고 말한다. 하지만 또래보다 몇 년을 훌쩍 넘겨서도 여전히 느리고 소극적인 모습만 보이는 아이를 바라보며10년 후, 20년 후에 있을 기다림의 대가를 상상하며 웃기는 쉽지 않다. 



그냥 뭐든지 밖으로 표출을 안했다. 말도 안했고, 노래도 안했고, 움직임도 크지 않았다. 관심을 보이는 대상이 별로 없었다. 세상을 호기심어리게 바라보며 여기 저기 주유하지 않았다. 아기 적에는 참 편했다. 많이 울지 않았다. 안전한 울타리가 있으면 대체로 그 밖으로 벗어나지 않으니 사고 걱정도 없었다. 질문의 폭풍 시기에 별로 질문을 하지 않는 아이가 있는 것도 알았다. 노래를 따라 부르지도 않아, 춤추기도 별로 안좋아해, 밖에 나가자고 조르지도 않고, 자동차 숫자판을 보고도 관심 없고, 엘리베이터 버튼 숫자에 관심을 안가져, 메뉴판을 보기는 커녕 저리 치워버리는 아이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저 앉아서 손으로 꼼지락거리고 눈으로 무언가를 바라보던,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착하고 특징없고 조용한데 잘 못하고 느린 아이. 



유아 시절에는 아직 물이 차지 않았나보다. 기다리자고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도록 그림만 보고, 친구랑 놀지 않아, 현실이나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도 없고, 질문에 동떨어진 응답을 하고, 무뚝뚝하고 불친절하고 혼자만의 환상속에만 처박혀 살던 아이. 나는 할 만큼 한 것 같은데 그저 조용하고, 쓸쓸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파묻혀 있는 아이를 보며 어느 날은 아이를 잡았다, 어느 날은 스스로 자책하기를 몇 년. 

우리 나라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까. 나중에 홀로 살아갈 수 있으려나.. 아이에게 불안함을 티내지 않으려고 밤마다 남편을 붙잡고 털어내기도 하고,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기도 하고, 책을 보며 위로받기도, 엄마의 잘못이라는 문구에 분노도 하다가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기다리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깜냥이 이것 밖에 안되는거야. 내 논리를 넘어서는 높은 차원을 만들어 가는거야. 천재는 원래 이해 불가능하다잖아. 억지로라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돌아버리겠으니까 이렇게 마음을 먹지 않고는 도리가 없었다. 



안되겠다. 아이에게 향하는 시선을 거두고 나에게로 모든 의식을 집중하자. 내 취미 활동을 더 진지하게 즐겨보자. 목표 의식을 가지고 공부하자. 계속 아이만 바라보고 살 수는 없지. 이제 충분히 컸으니 내가 사회인으로 독립할 준비를 하는 거야. 내 생활을 타이트하고 엄격하게 관리하자. 



이 과정에서 답을 찾았다. 



딸 아이는 ‘늦되고 덜 떨어진 아이’가 아니라 

‘내면 세계가 풍부한 내향적인 아이’라는 것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