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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X Writing Lab Nov 29. 2019

느린 사람의 고단함


리더십있는 사람이란 사람을 통솔하고, 목소리 크고, 많은 사람에 둘러쌓이고, 실행력 빠른 사람을 떠올린다. 사회성 좋은 사람을 떠올릴 때의 느낌도 다르지 않다. 새로운 곳에서도 금새 어울리고, 이야기를 주도한다. 화려한 외모, 넘치는 자신감, 수려한 언변, 유행과 트렌드를 이끄는 사람이 이상적으로 여겨진다. 훌륭한 사람,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한 중요한 자질을 떠올릴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 기준에 따라 잘 나서지 못하거나, 먼저 말을 걸지 않거나, 활동성이 적은 아이들에게 ‘잘못된 모습’이라는 딱지를 붙여버린다. 경쟁에서 도태하게 만드는 자질이므로 바뀌고 변해야 할 모습으로 여겨버린다. 웅변이나 스피치 학원의 인기는 ‘사회성 좋은 사람으로 커야 한다’는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나 또한 이 기준을 절대적으로 생각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자기 어필이 중요한 현대인이라면 대부분 이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자신감 넘치고, 말 잘하고, 행동이 빠른 사람을 ‘사회적인 사람’ 또는 ‘카리스마 있는 사람’으로, 조용하고, 부끄러움 많고, 생각 많고 행동이 굼뜬 사람을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규정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잘 모르겠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고민해보지 않았고, 고민해 볼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내가 어떤 사람이건 그저 ‘옳다’고 여겨지는 모습에 맞췄다. 재미있고, 좌중을 압도하고, 앞장서는 모습이 옳다니 그렇게 되려고 노력했다. 불편한 마음, 좌절감이 들었지만 기준이 틀릴 리 없으니 기준을 재고하기보다 스스로의 고삐를 더 죄었다. 



억지로 끼워맞추며 살았던 내 현실은 어땠을까? 빠르게 진행되는 대화에 끼어들지 못해 우물쭈물하기 일쑤다. 어쩌다 끼어드는데 성공하지만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거나, 존재감 없이 다른 차례로 넘어간다. 무엇보다 여러 사람이 쾌활하게 떠드는 자리의 간단한 가십 거리는 재미가 없없는데, 그래도 즐거운 척 어울렸다. 



젊은 시절에는 인터넷 회사에서 근무했다. 시시각각 트렌드가 바뀌고, 바뀌는 기술을 따라가는 것이 직원의 중요한 자질이다. 그러나 신기술과 경쟁사의 동향을 파악하기는커녕 아무도 보지 않는 자잘한 사안을 깊이 생각하느라 잘 따라가지 못했다. 사람들은 넓게 보고 나는 깊게 봤다. 나도 힘들었지만, 주변 사람도 나 때문에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개인 과제가 떨어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특유의 성실성과 책임감이 발동한다. 하나를 요구해도 다섯, 여섯 가지를 고민하고 결합한다. 정리되지 않은 사안들을 주고 받을 때는 전체 맥락을 파악하기 급급했는데 혼자 깊이 생각하고 작업하노라면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하고, 좋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남들보다 시간이 걸리지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기만 한다면 항상 훌륭한 결과물을 냈다. 하지만 삶의 대부분은 ‘찬란한 성과’보다는 ‘부자연스러운 불협 화음’이 더 많았고, 그 와중에도 내가 믿어온 ‘기준’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언제나 ‘내가 더 사회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결혼을 하고, 몇 년 후 아이가 태어났다. 



아가 적에는 너무 예쁜 순둥이였다. 울음도 길지 않고, 크게 말썽을 피운 기억도 없다. “위험하니까 만지지 말아줄래?”하면 정말 만지지 않았다. 위험하니 콘센트 구멍을 막거나 아이 때문에 소품의 위치를 바꿀 필요가 없었다. 위험하게 튀어나가거나, 막무가내로 움직이다 상처를 입은 일도 별로 없었다. 언어가 폭발한다는 서너 살 무렵, 고문에 가깝다는 쉬지 않는 “왜?’ 세례도 그저 수월하게 지나갔다. 이런 아이도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질문의 폭탄이 고문 수준이라니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셈이다. 동네 간판은 다 간섭한다는 아이, 어른들이 볼 수도 없게 식당 메뉴판을 뺏어서 본다는 아이, 엘리베이터 숫자에 집착하는 아이 등 온 세상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는 아이들의 탐험도 조용히 지나갔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고단하지만 고문에 가까운 질문과 끝도 없는 호기심은 아이의 지적 성장을 이끌어 내는 보석 같은 자질이다. 의아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첫 아이인데다 이런 아이를 많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말을 알아듣게 조곤조곤 잘해서’ 어른들의 말을 존중하는 것인라고 생각했다.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고, 통제가 안되는 아이들을 보면 부모가 잘못한 것이라고 여겼다.



혹시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모습, 함께 있어도 어울리기보다 따로 떨어져 노는 모습, 새로운 것이라면 한두 번 해보고 이내 포기해 버리는 모습, 익숙한 것에만 매달려 발전하지 못하고, 똑 같은 내용을 열 번 스무 번 말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땅만 쳐다보며 애처로운 모습으로 걸어다니고, 도저히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환상에만 매달린다. 조용하고 순종적이니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어디에서도 존재감없는 외로운 아이였다. 



내가 아이에게 그리 큰 걸 바란 것 같지는 않은데... 좋은 성적을 요구하거나, 모든 것을 잘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그저 책을 사랑하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상식적인 수준의 대화가 가능하기를 바랬을 뿐이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부터 시작된 고민은 4, 5 학년 즈음 정점을 찍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 아니면 아이가 문제가 있나 고민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엄마가 늦되서 질곡을 겪었는데 이제는 늦된 딸을 보며 수렁을 경험한다. 아픔을 알기에 더 견디기 어려웠다. 그네에서 몇 번 발을 구르고 금새 포기하는 아이에게 할 수 있다고 될 때까지 해보라고 했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홀로 세상에 빠져 있는 아이에게 같이 ‘어울리며’ 놀라고 제안했다. 포기하지 말라고, 용기내라고, 할 말을 당당하게 하라고, 뛰어 놀라고 했다. 



이런 모습은 대한민국 주류 교육계는 물론이거니와, 아이를 존중하고 배려하자는 육아계에서도 ‘극복하고 떨쳐내야 할 모습’으로 그려진다. 늦된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너나 할 것 없이 비슷하다. 잘못됬다, 바뀌어야 해, 사회 부적응자… 비슷한 성향의 아이를 가진 엄마와 함께 할 때 마음이 편하지만 모두가 패배자 감성에 시달린다. 여기에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내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나쁘다’ ‘변해야 한다’는 전제만이 있을 뿐이다.



늦된 사람들은 성공을 해도 ‘늦된데도 불구하고’ 잘된 것이고, 잘 안되면 ‘늦되기 때문에’ 안된 것이라고 한다. 느리고, 외롭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고, 안전 지향적이고, 예민하고, 진지하고, 답답한, 소위 ‘늦된’ 아이들은 정말 문제아인가? 극복해야 할 성향을 가진 아이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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