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육아서, 교육서에서도 늦된 성향이 어디에서 왔는지, 부모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아이를 기다리자는 육아계에서도 결국은 천재적인 결과물이 있어야 인정되는 듯하다. 답답했다. 누구에게도 시원한 답을 듣지 못했다. ‘기다리라’는 막연한 구호가 아니라, 확신에 찬 시각이 필요했다. 느린 아이, 늦된 아이, 호기심 없는 아이, 도전을 두려워하는 아이를 바라보는 다른 틀이 있지 않을까. 바람직한 모습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생물학적인 이유라도 있지 않을까. 찾고 찾았다.
난 할 만큼 한 것 같다. 책을 읽고, 삶에서 실천하려 노력했고, 아이를 가르치기보다 내가 먼저 변하려고 노력했다. “부모로서 충분치 않아. 더 해야 돼”라는 충고는 가혹하다. 내 생각이 잘못된 게 아니라 틀이 잘못되었음이 분명하다.
돌이켜 보면 남편과 내가 육아의 방향성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되 개별 상황에서는 완전히 반대로 대응해서 아이를 이중으로 압박하지 않았던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주로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내가 답답함 때문에 폭발할 지경이 되면 “원래 천재는 다 그런 거야. 차원이 다르니 이해도 안 되지. 아인슈타인, 에디슨 모두 어린 시절에 외로운 또라이였대”하고 너스레를 떨면 폭발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반대로 남편이 딸에게 수학 문제를 가르치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슴을 치며 나온다. “네가 뭘 그렇게 답답해하는지 알겠어. 정말 느리구나”하면 그때는 또 내가 “수학 좀 못하면 어때, 그림 천재가 수학 잘하는 게 더 이상하지” 하고 넘겨버렸다. 외동이라 모든 관심이 한 아이에게만 집중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느리디 느리고 사회적으로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그 모든 압박과 불안이 넘겨지지 않은 것은 가슴을 쓸어내릴 만큼 다행스러운 일이다. 상처에 특히나 더 예민한 느린 아이들이 이 불안을 온몸으로 받아냈다면 상처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이 와중에 수전 케인의 “콰이어트”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시끄럽고 빠른 성향이 세상을 이끄는 듯하지만 실제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조용한 사람과 조용한 사고라고 주장한다. 어릴 때 부끄러워 말도 못 걸던 아이가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되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 혼자 책만 읽던 아이가 성공한 사업가가 된 것은 딱한 기질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휘둘리지 않고 혼자 깊이 있게 사색하는 ‘엉덩이 무거운’ 기질 때문에 성공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저자인 수전 케인 스스로가 내향적인 인물의 전형이었다. 저자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조용한 책벌레였다. 부끄러움이 많았고, 친구들과 함께 하는 떠들썩한 캠프보다 조용히 집에서 책 읽는 시간을 더 즐겼다. 협업, 토론, 사교적인 자리에서보다 혼자서 조용히 생각하고 준비할 때 더 좋은 결과를 냈다고 증언한다. 화려한 언변, 강단 있는 주장, 사교성, 붙임성, 때로는 뻔뻔함까지 요구되는 변호사 세계에 들어서서는 남들이 으레 바라는 ‘좋은‘ 변호사의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내향적이고, 숙고하고, 분석하는 자신만의 내향적인 힘이 어떻게 통념을 깨고 성공한 변호사로 변신시켰다.
저자에 따르면 내향적인 사람은 인류의 1/3 이상, 내향성이 강한 아시아 같은 사회에서는 전체의 70% 에 달한다고 한다. 사람들의 통념과 다르게 외향적인 사람이 아니라 ‘매우 내향적인’ 사람들이 위대한 성취를 이루기에 더 유리하다고 한다. 이 책은 출간 후 미국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 책의 가르침은 매우 강력해서 ‘외향성’을 끌어내기 위해 고안된 회의 문화, 자리 배치, 커리큘럼 등이 내향적인 사람들의 잠재력을 제한한다는 점을 깨닫고 내향적인 사람들을 위한 수업 방식, 기업 운영 방식을 채택하는 분위기가 서서히 조성되는 중이다.
여기에 해답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늦된 아이라고 한 표현을 심리학에서는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부른다. 내향성, 외향성, 내성성, 느린 사람에 대한 책을 찾아 읽었다. 늦된 딸아이와 다른 아이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 아이들은 덜 떨어진 것도, 문제적인 기질을 가진 것도 아니다. 다만 내향적인 성향, 예민하고 섬세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이다. 친구나 관계에 집중하는 대신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것뿐이다. 깊게 보니 작은 변화에도 그토록 예민하고 섬세하게 반응한다. 깊은 세계를 탐험하니 다양한 세계를 그렇게도 거부한 것이다. 내향적인 아이들은 조용하게 오랜 시간을 안에서 결집하고 응축했다 때가 되면 엄청난 힘으로 폭발한다.
이제야 딸아이가 이해되기 시작한다.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답답하고, 늦되고, 문제적이라고 생각했던 모습은 그 작은 몸 안에서 조용히 숙성되는 중이었다. 깊고, 구수하고, 건강에 좋은 향내를 풍기도록 최적으로 발효하고 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