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절대적인 지지, 관심을 서서히 확장시키기
내향적인 아이들이 세상을 탐험하는 중에는
행복감, 외로움 같은 자의식이 자리할 틈이 없다.
세상과 단절된 채 오로지 자신과 그 대상만이 존재한다.
그런데 ‘세상’의 입장에서 이 아이들을 보면 ‘비정상’이다. 생각을 알 수도 없고, 정상적인 대화도 불가능하다.
단지 ‘늦될’ 뿐 아니라 ‘이상해’ 보인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스스로가 자신은 남들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교제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서서히 눈치챈다. 놀림과 비판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살아가는 한 순간 한 순간이 고달프다.
이 아이들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의식이 돌아온 순간 친구들과 대화나 놀이를 시도해 보기도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이런 아이들을 향한 사회의 시선은 부적응자, 재능 없는 아이, 비정상, 퍼거슨 증후군, 자폐, 난독증, 괴짜처럼 온통 병으로 진단하고 때려 고치려는 것뿐이다. 타고난 예민함을 가진 이 아이들은 더 자신 안으로 피신하고 칩거할지 모른다.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아이의 내향성으로 인해 부모가 더 힘들까
아이 본인이 더 힘들까.
외딴섬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체가 이 아이들에게는 크나큰 도전이다. 그걸 온전히 살아내는 사람은 아이 자신이다. 부모는 이런 아이를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안 그래도 모든 사회가 이 아이를 뜯어고치려고 아우성이다. 비판하고 재단하는 시선뿐이다. 부모까지 그 역할에 가세하지 말자. ‘틀린’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일 뿐이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해주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흥미로운 사실은 자기 목적성을 가진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가족과 지내는 시간이 유달리 많다는 점이다.
그들이 어째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요령을
더 많이 터득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여기서 풀린다.
가정이라는 보호막 안에서 아이는
구태여 자의식을 느낄 필요도 없고
방어 의식이나 경쟁심을 느낄 이유도 없이
편안하게 이런저런 실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밝고, 명랑하고, 똑똑한 아이라면 안 그래도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늦된 아이들은 부모밖에 없다. 단 하나의 믿어주는 사람만 있어도 아이는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기를 수 있다. 자존감을 오롯이 키워줬다면 이 아이들이 세상에 나가는 순간 대상과 밀착해 왔던 자신만의 열정과 독창성으로 널리 널리 세상을 날아오를 것이다.
아이의 내향성으로 인해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이가 남들보다 느리다는 사실이 아니라 소극적이고 예민한 태도, 부정적인 생각이다.
특히나 그림을 좋아하는 딸아이를 위해 세상의 다양한 예술과 예술가를 알려주고 싶었다. 더 많은 그림, 더 많은 예술가를 알기를 원했다. 하지만 돌아온 응답은 “싫어” “별로”... 애써 데리고 가도 “그럴 줄 알았어” 하는 정도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를 마주하다 보면 부정적인 에너지가 나에게까지 전해져 결국 험악한 상황에 이르는 날이 많다.
내향적인 아이들은 현상태에 머무르려는 욕구가 강하여 웬만하면 새로운 시도를 거부한다. 안전지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이의 뜻을 존중하는 게 옳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이 옳을까?
우리 부부가 딸을 위해 선택한 전략은
‘느림을 인정하고’ ‘굼벵이처럼 천천히 움직이기’이다.
그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 조심스럽게 확장을 시도하되, 싫어하면 인정했다. 남들 다 이해한 것을 몇 년 후쯤 이해하니 항상 제 연령대보다 낮은 것을 권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 동화책과 만화책만 집어 들기에 조심스럽게 다른 것을 권해보지만 거부하면 인정했다. 제아무리 반 고흐나 피카소라도 아이가 자발적으로 원한 것이 아니면 그러려니 생각했다. 거부감을 키우기보다 낮은 수준에 머무를지언정 천천히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부모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분노와 이러다 아이가 남의 배려만 기대하는 사람으로 자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하루에도 수십 번은 치달아 올랐다. 하지만
원하는 것은 충분히 하게 하되,
원하지 않을 때 비난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존중해 주었더니
커가면서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밝힐 줄 알게 되었고,
자신이 싫을 때 인정받았던 것처럼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인정하는 아량이 생겨났다.
싫어한 것도 막상 가보면 좋았던 체험이 한두 번 늘어나자
조심스러울 망정 스스로 발을 떼는 일이 생겨났다.
엉금엉금 반경을 확장해 왔더니 이제 자신의 취향을 귀신처럼 찾아낼 줄 안다. 딸은 세계적인 명화보다 애니메이션, 캐릭터, 일러스트레이션을 좋아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이 나오면 몇 분이고 뚫어지게 쳐다본다. 좋아하는 그림 스타일이 나온 책이라면 애지중지하며 간직한다. ‘딸이 읽기를 원하는 책’을 권하기를 멈췄더니 본인이 좋아하는 책을 귀신같이 찾아내는 안목도 가지게 되었다.
내향적인 아이는 “싫다”라고 말한 것뿐이다. 이 태도가 아이의 미래를 망친다거나 사람들이 싫어한다거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은 부모의 해석일 뿐이지 사실이 아니다.
내향적인 아이들은 원시시대 불씨 다루듯 조심조심, 애지중지 다뤄야 한다. 꺼지지 않으려면 더 많은 사랑과 희생이 필요하다. 한 순간만 방심하면 꺼진다. 다시 타오르지도 않는다. 환경을 자주 바꿔도 안된다. 하지만 존중하며 애지중지 다뤘더니 비로소 꺼지지 않을 작지만 단단한 불씨를 보여준다.
워런 버핏, 빌 게이츠, 강수진, 안철수, 이영표 모두 친구들과 말 한마디 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줍음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촌철살인의 연설을 하고, 주변 사람들과 행복한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만인 앞에서 깊은 감정 표현을 주고받는 무대인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사색과 숙고의 시간을 가지며 내면과 맞닥뜨리는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성향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단단하게 뿌리박았다면
부족한 점을 조금씩 보완하며
본인만의 색깔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느리고 또 느리고, 하나를 알기 전까지는 절대 발걸음을 내딛지 않더니 작은 조각들이 꿰맞춰지기 시작하자 현실 세계를 향해 조심스럽게 한 발짝씩 떼기 시작한다.
세상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자신을 굳건하게 세운 후에 세상으로 나간다.
늦된 아이일수록 더 시키면 안 된다. 늦된 아이일수록 더 방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실패의 기억만 가진 채 더 소심하고, 더 늦되고 더 덜떨어진 아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느리디 느린 아이가 남들보다 몇 년쯤은 더 걸려서 비로소 하나를 깨닫고 나면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다른 한 발짝을 떼고 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은 여전히 느릴 것이지만 구수하게 곰삭일 줄 아는 특유의 능력으로 누구보다 꼼꼼하고 누구보다 차분하게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