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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X Writing Lab Feb 27. 2020

초등 역사토론: 정약용 토론 사례

시대순으로 역사를 훑다가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주제가 나오면 진도에 구애받지 않고 충분히 훑고 나온다. 



(참고 글: 우리 동네 역사 토론 모임)



조선 후기 실학에 이르자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졌다. 



주제가 방대하니 이번에는 실학의 거장인 정약용을 주제로 특별 시즌을 선정했다. 



이 기간 동안 우리가 진행한 내용을 살펴보면 

1. 역사책 읽기

2. 정약용 전기, 또는 정약용이 저술한 책을 읽기

3. 남양주 실학 박물관 방문

4. 수원 화성 방문



위의 내용을 어떻게 진행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자. 




정약용 관련 서적 읽기 


장장 3달에 가까운 시간을 정약용이라는 주제로 읽고, 토론하고, 찾아갔다. 



유적지나 박물관을 방문하기 전에 자그마한 사전 지식이라도 있고 없고의 차이는 배움의 차이를 낳는다. 실학 박물관과 수원 화성을 찾기 전에 한 달이 넘게 역사책으로, 정약용 관련 저서로, 실학에 대한 책으로 배경지식을 쌓았다. 



책 한 권을 통째로 읽기에 시간이 만만치 않을 때 어린이판 서적들이 큰 도움이 된다. 핵심이 잘 요약되어 있어 쉽고 빠르게 사전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역사, 인문서를 원문으로 읽어야 한다, 만화나 문고판은 독서의 질을 떨어뜨린다"



는 독서법을 옹호하는 사람이 많지만, 내 경험상 그건 원문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나 슬로우 리딩의 환경이 갖춰졌을 때 해당되는 말이다. 



개개의 독서가들 중에는 지적 호기심으로 모르는 것도 참아 넘기며 읽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오히려 이해를 못해서 금세 포기하고 만다. 내가 그랬다. 




박물관 체험을 할 때 “반감을 갖지 않게 하기”에 공을 들였듯이,
토론 모임도 “반감 갖지 않기, 역사를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받아들이기”에
공을 들인다. 




역사는 긴 호흡으로 배워야 하고, 울렁증을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설사 제대로 책을 읽어오지 않을 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들이 잠재 기억에 콕콕 박혀 세월이 흐르면 다른 추진력으로 작동을 할 것이라 믿기에 서두를 필요도, 종용할 필요도 없다. 아마 역사 모임을 2년 이상 끌어온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면 이런 ‘내려놓음’이 아닐까 한다.  




조선 후기 실학의 등장 부분을 역사책으로 훑고 난 후 그다음 시간에는 정약용과 관련된 도서를 읽어왔다. 엄마들은 “유배지에서 온 편지”나 “목민심서”를 읽었고, 고학년 아이들은 어린이판 정약용 전기나 목민심서, 저학년 아이들은 정약용과 관련된 만화책이나 동화책을 읽어왔다.




정약용의 위대함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어른들은 시작하는 순간부터 흥분을 그치질 못하는데 아직 그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은 어른들 왜 또 저러느냐는 눈빛이다. 어른들이 우리 역사를 대하며 즐거워하고, 때로는 의견 충돌도 하고, 때로는 분개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모임의 의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한 아이가 "정약전과 정약용이 밤새 토론했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라고 하면서 이야기꽃이 피었다. 


“천주교 신자라는 누명을 쓰고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기 전날, 두 사람이 밤새 주막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데, 그저 북받치고, 서럽고, 기약 없으니, 무슨 말을 하려는데 목이 매서 말은 안 나오고 눈물만 하염없이 흐르는 장면에서 목이 매었어요.” 


“이 장면에서 정약용 선생이 시를 지었는데 읽어보실래요?” 




띠로 이은 주막집, 새벽 등잔불이 푸르스름 꺼지려 해

자리에서 일어나 샛별 바라보니 이별할 일이 참담해라.

그리운 정 가슴에 품은 채 두 사람 말을 잃어

애써 목청을 다듬건만 목이 메어 울음만 터지네.

머나먼 흑산도는 바다와 하늘뿐인데

형님은 어찌 그곳으로 가십니까?




"형 정약전은 정약용에게 최고의 학업 상대이자 자신보다 자기를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했대요. 그런 사람과 누명을 쓰고 죄인이 되어, 언제 다시 만날 지 기약 없이 헤어지니 얼마나 슬펐을까요. 한편으로는 이런 사람을 인생에 가진 두 사람이 매우 부럽기도 하네요."



"저도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사람, 최고의 배움 친구를 인생에서 꼭 가지고 싶어요. 너희들한테도 이런 사람이 꼭 생기기를 바래." 



"너희들은 죄가 없는데 누명을 쓰고 머나먼 곳으로 유배를 간다면 어떨 거 같니? 거기에서 뭘 하고 지낼 거 같아?"



"아무도 없는 곳에 가면 저는 평소에 못한 일을 마음껏 할래요."

"그러니? 평소에 많이 바빴니? -.-;;;"

"저는 먹을 것만 있다면 괜찮을 거 같아요."

"저는 환경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내가 좋아하는 자연이 많으면 괜찮아요." 



요 녀석들이 유배가 공기 좋은 데로 산책 가는 건 줄 안다. 



"태은아, 만약 태은이네 옆 집에 감옥에 다녀온 전과자가 온다면 어떨까? 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다가가 불편한 점이 있는지 보살펴주고 필요한 것을 줄 수 있어?"


"아뇨. 무서울 거 같아요. 가까이하고 싶지 않아요." 


"본인에게는 누명이라지만, 유배지 주민의 입장에서 정약용 선생님은 죄인이잖아. 태은이처럼 자기 마을에 온 죄인이 무섭고, 멀리 하고 싶었을 거야. 유배는 형벌이야. 가족도, 돈도 지위도 집도 잃고 벌 받으러 가는 거야. 마을 사람들은 다 범죄인 취급해. 아무도 따뜻하게 오지 않아." 


"아...." 


"이런 상황에서도 자기 몸을 바로 세우고, 말을 가다듬고, 다른 사람을 예로 대하고, 학문을 수련한 정약용 선생님이 참 대단해요. 범접할 수 없는 위인이란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 빛을 발하네요. 큰 일을 생각하기 전에 내 몸가짐부터 바로 잡고, 말을 가다듬고, 주변을 아름답게 가꾸고, 주변 사람 챙기기를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사실 가장 어려운 일인데, 나의 작은 일상부터 되돌아봐야 한다는 걸 자주 잊게 되는 것 같네요." 


"많이 찔리고 많이 배웠어요. 모두가 다 나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아서 반성이 되고 아이들에게나, 나에게나 앞으로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네요." 



우리 모임은 아이들은 시큰둥하고 항상 엄마들만 감동하고, 엄마들만 공부하고 싶어 한다. 



"너희들은 아직 잘 안 다가오지? 우리 다음 달, 다다음 달에 너희들이 읽은 것을 직접 보러 다닐 거야. 너희들은 그냥 놀아. 보고 배우는 건 엄마들이 할게. 알았지?"



이런 대답은 아주 우렁차게 한다. 







남양주 실학 박물관 방문  


세 시간에 걸쳐 실학과 정약용에 대해 맛보기를 본 후 남양주의 실학 박물관, 정약용 생가지에 놀러 갔다. 정약용 생가지와 붙어 있는 곳이라 정약용 박물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약용이 주제가 아니라 실학이 주제인 박물관이다.



해설자 분의 설명에 따르면 


"정약용 선생을 연구하는 학자도, 관심도 많은데 정약용 선생은 실학의 열매일 뿐 실학 자체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실학 자체에 대한 연구는 미미하고 온통 정약용 선생님 연구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 박물관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정약용 박물관’이 아닌 ‘실학 박물관’입니다.” 



실학은 임진왜란 이후 등장했다. 전쟁으로 국토의 80%가 황폐화되어 농사지을 땅이 사라지면서 백성은 먹을 것이 없었고, 나라는 거둘 세금이 없었다. 실학은 거대한 뜻이나 이념이 아니라, 적은 토지에서 더 많이 생산하고, 분배해야 했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찾아온 삶의 방책이었다.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사대부가 직접 농서를 연구하고, 경작을 해보는 작은 노력들이 대동법이라는 제도의 시행으로 분수령을 맞이하게 되었다. 세금을 지역 특산물로 바치는 과정에서 중간에서 세금을 거둬들이는 대납가들의 폐단이 어마어마해서 백성은 막중한 세금에 시달리고 국가 재정은 시들해졌다. 



대동법은 세금을 특산물이 아닌 쌀로 통일함으로써 특산물을 비싼 값으로 조달하며 막대한 이윤을 챙기던 대납가들이 고사되었다. 제도 하나로 백성들의 세금 부담은 줄고, 조정은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해설가 분에 따르면 대동법은 조선 최고의 제도 개혁이다. 



이 외에도 서양 문물이 전래되고, 청, 일과 교류를 하면서 우리 생활과 관련된 실제 학문에 대한 필요성이 커졌다. 



실학의 큰 흐름은 다음과 같이 나뉜다. 

1. 농업을 중심으로 한 중농학파(경세치용파) - 이익, 안정복, 정약용

2. 상업을 중심으로 한 중상 학파(이용후생파, 북학파)-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3. 고증 학파(실사구시파) – 김정희



농업 국가 조선은 실학의 흐름도 중농학파 위주로 발전했다. 상업과 무역으로 경제를 발전시키자는 중상 학파는 근대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룰 정도의 혁신적인 사고였으나 상업을 천시하던 조선에서는 소수 급진적인 개혁가의 생각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청나라가 오랑캐 나라라고 여전히 무시하며 명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조선은 스스로를 소중화라 일컫는 소중화 사상에 여전히 갇혀 있다 

…  

‘오랑캐는 청이 아니라 우리다.’"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이후 실학은 언어, 역사, 지리, 산업의 다양한 방면에서 "우리"를 연구하자는 국학의 자주적인 흐름으로 이어진다. 



유럽 사회는 14세기 선박 기술을 발전시키며 세계를 누비며 자본 경제를 발전시켰다. 일본은 16세기 100 년간의 전국 시대를 맞아 막부들 간에 치열한 전쟁을 하며 살아남기 위해 변화와 혁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충효에 입각한 성리학 정신만을 강조하며 개혁의 흐름을 거부한 조선은 점점 폐쇄적인 고립 국가의 길을 걸음으로써 서로 다른 운명을 겪게 된다. 



조선 후기부터 시작된 철저한 나락의 경험을 마주할 때마다 불편한 마음이 들지만 또다시 같은 역사를 겪지 않으려면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며 역사 속에서 현재의 삶의 교훈을 끄집어낸다. 



조선 후기부터 역사를 대할 때마다 갑갑하고 비장한 마음이 생기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바닥을 딛고 일어서 현재의 부강한 민주 사회를 이룩했다는 점이 놀랍다. 바닥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몸부림치며 비상하는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본다. 




우리나라, 우리 국민은 존재 자체만으로
세계 최고의 감동 스토리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나치게 피해자 정서에 사로잡혀 있다. 



미국에서 관찰한 역사 교육은 자부심을 고취시키거나, 또는 잘못한 것을 반성하는 데에 집중되어 있었다. 잘못을 지적하거나 시대나 상황을 탓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떤 나라도 영원히 흥하지도, 영원히 쇠하지도 않는다. 그 시점에서 배울 점을 생각하고 좋은 점은 유지하고 나쁜 점은 고치면 그만이다. 피해의식을 버리고 성숙하고 자긍심 넘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드는 데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조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실학 박물관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정약용 생가지로 향했다. 


한 아이가 "우리 역사 같은 거 없이 그냥 놀기만 하면 안돼요?"하고 묻는다. 



내 눈에는 박물관이든 유적지든 놀고만 있었는데 나름 부담은 있었나 보다. 대놓고 놀면 재미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재미없는 법이다. 부담가지는 짬짬이 놀아야 스릴도 재미도 커지는 법. 게다가 역사를 핑계로 놀만큼 놀고 있다. 내 대답은 "역사 같은 거 말고 그냥 놀 수 없어!"



정약용 자택의 당호가 여유당이다.  듣기에는 여유롭고 넉넉한 느낌인데 뜻은 정반대이다. 앞뒤 재지 않고 용기만으로 나서고, 내키지 않으면서도 정에 이끌려 다니다 실컷 욕먹고 화를 당하는 자신에게 “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 사방을 두려워하라”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당호이다. 



이렇게 2019년 정약용 특별 계절의 추억이 쌓여가고 있다. 다시 반복해서 실학 부분에 이르면 아이들은 어떤 마음과 생각을 가지게 될지 참으로 궁금하다. 







수원 화성 방문 


새로운 국가와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정조는 수원에 화성을 건설했다. 화성 설계의 이론, 기술, 진행의 총책임자를 정약용에게 맡겼다. 화성 축조의 과정은 화성성역 의궤라는 문서에 담겨 수원 화성과 함께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화성은 왕이 머무는 공간으로서의 ‘성’이자, 전쟁이 일어나도 산으로 피신하지 않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방어용 ‘도시’이기도 하다. 



정조는 자급자족, 상업, 물류, 군사의 기능까지 수행하는 ‘도시 국가’를 꿈꾸며 만들었다. 도시의 기능을 구상하고, 그에 따라 길 닦고, 건물을 올린 세계 최초의 신도시라 할 수 있다.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옹성, 치성, 포대, 석궁단, 장대, 암문 등 각종 군사 시설을 관찰할 수 있고, 그 아래로 너른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다. 화성은 화성성역 의궤를 바탕으로 계속 복원 중에 있다. 



남쪽의 팔달문, 북쪽의 장안문이 웅장하고, 시가지는 남쪽 팔달문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우리는 북문인 장안문을 시작으로 화서문, 팔달산을 올라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를 찍고, 화성행궁으로 내려와 노천 변이 아름다운 화홍문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둘러보았다. 평지부터 산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을 크게 돌면서 야트막한 길과 녹음이 우거진 산길을 걷는 맛이 일품이다. 




역사를 좋아하는 아이는 유적지에 오기 전
공부를 하고 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놀러’ 온다.




절대로 ‘미리 공부하고 와라’ ‘이 안내문 읽어라’ ‘쓸데없는 것 보지 말아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가르치려 들지 않고 힘 빼면서 여행하는 게 더 어렵다. 역사를 암기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반감을 갖지 않게 하는 것은 꽤나 큰 공력이 필요하다. 이 와중에도 남자아이들은 군사 시설을 보고, 여자 아이들은 벽돌에 그려진 무늬를 본다.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는 활쏘기, 산타기에 열중한다.
아이들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역사를 자신의 관점과 눈높이로 끄집어낸다.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에너지가 철철 넘치는 아이들은 조금 지나면 덥다, 언제까지 걷냐, 왜 가냐 아우성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구동성 하는 엄마의 말은 가족끼리 갔더라면 끝도 없이 나왔을 불만이지만 어느새 쏙 들어간다는 것이다. 



한 아이가 민들레 홀씨를 불자 서로 볼이 터질세라 불어대기 시작한다. 여자 아이들은 얌전하게 호호 불고, 상남자 꼬마 아이는 무더기로 뽑아 들고 침을 발사하며 불어댄다. 그렇게 오르다 보니 불가능해 보이던 정상에 올랐다. 정자에 앉아 간식도 먹고, 작전 회의도 하고, 대자로 누워 옆 사람에게 민폐도 끼치며 잠시 숨을 돌렸다. 



세계문화유산이라 외국인 관광객이 많았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로마 유적지 나폴리 유적지 안 부럽다. 화성은 튼튼하고 방어에 유리하도록 성곽을 일자로 세우지 않고 꼬불 꼬불 만들었다. 걷다 보면 갑자기 예기치 않은 샛길이 나오고, 휙 돌면 또 생각지도 못한 공간이 나타난다. 지형지물이 다양하니 군사 작전도 다양하게 펼칠 듯하다.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여자아이들이 끝말잇기를 시작하자 갑자기 남자아이들이 거칠게 가세한다. 조용한 끝말잇기는 똥으로 시작해서 똥으로 끝나는 무한 똥 루프로 돌변한다. 여자 아이들은 웃음을 그치지 못하고, 열광적인 반응에 힘입어 남자아이들은 더 가열하게 만들어낸다. 



남자아이들의 이런 재치야말로 나라를 이끌어가는 진정한 똘기라는 생각이 든다. 무식함, 밀어붙임, 굴하지 않음, 극단적인 유머 코드는 어마어마한 추진력과 열정의 씨앗이다. 이러할진대 남자들의 엄청난 잠재력과 성향을 고분고분하게 길들이려는 현시대의 양육 방식이 참으로 안타깝다. 



남자애들이 구질구질 땀에 찌들어도, 실험한다고 다 부수고 다녀도, 한 가지에 꽂혀 기인처럼 굴어도 "역시 크게 될 아이는 씨앗부터 다르구나” 생각해 주면 안 될까. 나는 남자아이들의 뒤통수치는 행동들이 너무 사랑스럽다. 격정의 끝말잇기로 배를 쥐어 잡고 웃더니 이내 다리가 풀려 못 내려간다고 또 투덜이다. 



잠시 후에 어떻게 될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는 아이들의 집중력이 참으로 부럽다. 힘드니까 힘을 조절하거나, 어려울 테니 미리 준비하다 보면 순간에 충실할 수 없다. 크면 알아서 평생 눈치 보며 조심조심 에너지 분산해가며 살 텐데 어릴 때부터 조절하라고 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 단, 네 마음대로 하다가 초래되는 결과만 스스로 감수하렴. 



이렇게 2시간이면 올 거리를 5~6 시간 걸려 화성행궁에 도착했다. 행궁에 들어갔더니 지친 아이들 폭발하기 일보직전이다. 그래그래, 나가자 하며 나갔는데 행궁 앞 광장에서 자전거를 타자 다시 언제 지쳐 떨어졌냐 싶게 에너지가 치솟는다. 



박물관이나 유적지에 가면 어른들은 열심히 설명하고, 아이들은 열심히 기록하는 팀을 많이 본다. 우리 모임은 별로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나는 어릴 때 박물관에서 설명을 듣는 것이 너무나 지겨웠다. 나이 들어 엄마가 되니 누가 등 떠밀지 않아도 아이들 데리고 공부하고, 유적지의 의미를 알고 싶어 지는데 어릴 때는 그저 즐거운 기억을 담아오는 것으로 충분하다 싶다.  



비슷한 사람들이 만난 건지, 2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하며 코드를 맞춰간 건지 불분명하지만 우리는 하나같이 "다른 박물관 체험 코스에는 지식만 있고 노는 시간이 없는데 우리는 노는 시간이 많아서 좋아요~~~"라고 말한다. 앞으로도 "지식의 현장에서 지식 없이 놀기" 콘셉트는 계속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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