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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Aug 27. 2018

글 쓰는 일이 일인가요?

글 쓰는 일은 나 자신을 모두 내어주는 일이다.

      나의 글 쓰기 욕망은 학창 시절 꾸준히 그리고 띄엄띄엄 내 삶을 엿보고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는 특수활동이라는 이름하에 무조건 특정 부서를 가입해야 했다. 나는 비인기 부서인 운문부에 들었다. 그 이유는 나의 자매, 언니가 운문 부였기 때문. 언니는 나의 유일한 롤모델이자 세상의 선두주자이며 신여성이었다. 내가 운문부에 가입하는 것은 운명의 카르마와도 같았달까. 어찌 됐든 초등 3년, 내 인생에서 처음 글을 쓴 나이다. 나는 몰랐다. 그때 책벌레였던 언니의 영향을 받아 책이라고는 공무원 합격 이후 일절 읽지 않는 언니를 대신해 미친 듯이 책을 사들이고 읽을 줄은. 지금은 주기적으로 책을 주문하지 않으면 불안증세가 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김영하 작가가 말했다. 책은 읽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것이라고.

고등학교 2학년, 나의 담임은 문학 선생님이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예술제를 기획하고 있었고 역시나 비인기였던 문학동아리의 학생들의 작품이 모자랐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반 아이들 모두에게 필수로 시를 한 편씩 지어오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가슴이 뛰었다. "좋아, 솜씨 좀 뽐내볼까?"정도였을까. 선생님은 스크린에 자신의 작품을 띄우고 직접 읽게 만드셨다. -그땐 미처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꽤나 감성적인 무뚝뚝 맨이다.- 내 시를 읽자, 선생님은 내가 의도한 단어의 함축적 의미를 대번 말씀하시고 나는 속으로 끄덕끄덕했다.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선생님.' 내 작품은 예술제에 걸리게 되었고 추후에 돌려받은 액자는 안방에 걸리게 되었다. 의무교육 기간 동안 '막내딸에게서는 처음'으로 이런 일을 겪은 엄마는 무척이나 놀란듯했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13년 동안 단 한 번도 글에 손을 대지 않았다.


백수였던 31살의 여름, 첫 단편소설을 쓰고 만다. 이유는 없었다. 나에겐 여유 시간이 생겼고 좋아하던 작가의 책을 읽는 동안 글이 쓰고 싶어서 좀이 쑤셨다. 차마 가족인 언니에게는 보여주기 힘들어 드라마 작가 활동을 하고 있는 언니의 친구에게 피드백을 부탁했다. 그녀는 언니의 친구답게 어설픈 칭찬으로 나에게 헛된 꿈을 심어주지는 않을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믿고 두려워하며 내 글을 보냈다. 과연 칭찬 3줄과 비평 1.5페이지의 한글 파일이 돌아왔다. 그것을 받고 나는 이상하게도 한동안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런 나를 보고 언니는 본인의 동생이라 친구가 점수를 후하게 준 것이었을까 봐 걱정을 했을 정도였다. 내가 정색하고 비평 분량을 말하기 전까지는. 내가 기분이 좋은 이유는 내가 제일 신경 쓴 부분을 칭찬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1.5페이지의 분량은 이미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에서 지적을 받았기 때문에 크게 상처 받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글을 쓴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혼자 쓴 글을 몇 번이고 퇴고만 하다가 그 결과물을 드디어 누군가가 읽어준다는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다시 본업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일 년이 지났다. 직장에 몸이 묶여있으면서도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에게 말하고 싶다. '글은 나 자신을 모두 내어주는 일이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나 자신을 꾸준히 독려하고 채찍질을 해야만 정해진 분량을 채울까 말까이다. 이런 연유로 나는 다시 퇴사를 한 후에야 글 쓰는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두었던 글의 소재들을 정리하고 트리트먼트까지 써 두고도 브런치에 짧은 글을 남기는 것은 나 자신에게 주는 당근이다. 소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채찍만이 존재하는 작업이다. 뭐라도 금방 끝이 나는 짧은 글이라도 꾸준히 써야 브런치에 투고를 해 볼 것이 아닌가. 이 글은 브런치 작가가 되기 전에 쓴 것이다. 


나는 활자 중독이라 종이 신문이나 에세이, 병원 팜 플랫도 닥치는 대로 읽는다. 최근에는 트위터에 빠졌다. 문제는 트위터에 짧은 글을 쓰면서도 너무나 신중하다는 것. 내가 제일 신경 쓰는 부분은 뻔하지 않은 글에 대한 집착이다. 모든 글이 나의 작품은 아닐진대 조금이라도 뻔한 표현은 내뱉기를 꺼려졌다. 고등학교 예술제에 출품할 작품을 쓸 때의 자신감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이만큼 평생에 걸쳐 꾸준히 하고 싶은 일은 글 쓰기 뿐이다. 이리도 괴롭고 좋은 일이 없다. 앞부분에 언급했던 카르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전에는 작가란 글재주가 있는 사람이 앉은자리에서 뚝딱뚝딱 망치질을 하듯 금방 만들어내는 줄 알았다. 하지만 쓰는 일은 생각만큼 가볍지 않았다.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이후로는 짧은 글이라도 어딘가에 기고하는 사람을 보면 경이롭고 존경스럽다. 이렇게 힘든 일을 주기적으로 하다니. 글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정신노동의 최고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 하고 싶다. 조금 과장하자면 글쓴이의 영혼의 열매를 자본과 맞바꾸는 일처럼 여겨진다.


글을 쓰는 이유는 뭘까.

쓰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  내가 글을 쓰지 않고 뭘 할 수 있을까. 능력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말 그대로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글에 이끌려 와 여기에 자리를 펴고 어떻게든 써내려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처럼 글이 쓰고 싶어서 좀이 쑤시고 못 견디겠다면 얼른 쓰는 사람이 되길.





작가에게 중요한 건 오직 ‘쓴다’는 동사일 뿐입니다. ‘잘 쓴다’도 ‘못 쓴다’도 결국에는 같은 동사일 뿐입니다. 잘 못 쓴다고 하더라도 쓰는 한은 그는 소설가입니다.

김연수「소설가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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