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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Sep 12. 2018

영양사님, 나쁜 남자 같아요!(下)

나도 여자랍니다.

 사진 속 핼러윈데이 캔디는 내가 열정이 너무 과다하여 만들었던 이벤트다. 이걸 만들면서 조리원들에게 핼러윈데이를 챙기는 영양사는 처음 봤다며 욕 아닌 욕을 얻어먹었다. 외국계 산업체라 타국에 와 있는 외국인 직원이 잠시라도 웃을 수 있길 바라며 기획했다.




 피급식자들이 밥을 먹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내가 있는 곳은 출입증 카드로 식권을 출력하여 식권 통에 식권을 넣고 밥을 가지러 가는 시스템이었다.


 여기서 설명하는 나의 직장은 직영이 아닌 위탁급식업체이고 피급식자와 나는 동료 관계가 아니고 비즈니스 관계다. 나는 식사를 제공하는 급식업체 소속이고, 피급식자는 돈을 내고 밥을 먹는 고객이다.


 그 식권이 우리 급식소에는 매출로 잡히기 때문에 영양사로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어떨 때는 배식을 조리장에게 맡기고 오직 식권 만을 관리할 때도 있다. 출입증 카드를 깜빡하고 안 가지고 오면 수기 대장에 부서와 이름을 적고 사인을 한다. 그런데 종종 카드를 찍는 것도, 사인을 하는 것도 귀찮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객님 카드를 찍어주시겠습니까?"라고 부탁을 하면 "나갈 때 찍을게요."라고 대답한다. 왜일까? 지금 줄 서 있는 김에 카드를 찍거나 사인을 하면 동선상 매우 편하다. 그리고 퇴식구와 카드리더기는 상대적으로 멀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그대로 나가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정말로 나갈 때 찍으러 오는 사람도 있다. 내가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은 후자다. 정말 밥을 먹고 사인을 할 거라면 왜 내가 부탁할 때 하지 않는 걸까. 처음에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후에는 그저 그 사람 스타일이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전자의 경우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있지만 나는 일을 할 때면 묘한 승부욕이 생기는 스타일이라 그런 일을 그냥 두고 넘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그냥 가버린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고 다음날 밥을 먹으러 왔을 때 주변 동료 직원에게 그 사람의 이름을 물어본다. 그러면 후에 그냥 가더라도 내가 대리사인을 한다. 그 사람은 사인하라는 잔소리를 듣지 않아서 좋고 -정작 당사자는 왜 오늘은 사인하라는 소릴 안 하지, 하며 찝찝한 표정으로 서 있는데 나는 그 시간을 즐긴다.(변태다) -나는 이름을 아는 직원이 하나 늘었다. 어찌됐건 식권=돈이다 보니 급식경영을 해야 하는 영양사 입장에서는 굉장히 예민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잠깐, 영양사가 단순히 영양소와 칼로리만을 생각하여 식단을 짜고 식자재를 주문하는 일만 하는 사람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학과 전공과목에 급식 경영과 회계관리가 있다. 영양사의 주요 업무 중 하나인 자재 비용 관리와 매출관리를 하려면 필수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지식이다. '한가롭게 식단이나 짜다가 밥 먹는 시간에 나와서 피급식자들을 둘러보는 게 영양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급식 전반에 필요한 모든 재무관리와 인사관리, 조리(맛)까지 관리한다.


그러니 식자재나 부가 지출을 하여 돈을 쓴 만큼 밥을 먹으러 오지 않으면 영양사 입장에서는 손해다. 여하튼 그런 이유로 식권 관리에 눈에 불을 켤 수밖에 없는데, 피급식자 입장에서는 그게 굉장히 가혹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우리가 급식을 제공하는 회사에서 하청을 받아 일을 하는 업체에도 식사를 제공했다. 규모는 다소 작아도 알짜배기 튼튼한 회사들.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고 식대는 따로 지불한다. 돈을 따로 지불하니 사인 대장도 따로 있다. 10명 남짓인 직원들 이름도 다 알 정도다. 그런데 그들 중 유일하게 사인 대장에 이름을 적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사. 장. 님. 본인 돈이 나가다 보니 아까운 것인가. 그래서 내가 매번 이름을 따로 적었다. 사장 이름은 굳이 필요 없을 것 같아 '사장님'으로 적었다. 그런데 한 번은 국을 배식하고 있는 나에게 역정을 내는 것이 아닌가. "내 이름은 이따가 적으면 되겠네!"라고. 지당하신 말씀. 내가 적을거다. 그런데 내가 꼬박꼬박 매일 적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역정을 낸 것이었다. 밥 값은 4200원. 옛말 하나 그른 거 없다. 있는 놈들이 더 하다.


내가 일한 곳은 여/남 비율이 거의 1:9라서 그런지 '나쁜남자'가 많았다. 언제 한 번 나쁜남자 특별 편을 써야겠다.(지금 쓰고 있는 것은 무엇?) 한 가지 소명을 하자면 나쁜남자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버텨내고자 고군분투하던 영양사는 나쁜남자가 되었다. 다음에 또 어떤 회사에서 일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쁜남자만은 자신 있다. 그렇게라도 유연하게 녹아들어(?) 나만의 생존 방식을 또 터득할 것이다. 부디 나를 나쁜남자라고 부른 L모씨, 저를 너무 미워하진 마시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응원해준 착한 남자들 -매번 밥을 먹을 때마다 항상 고맙다 인사를 한 번도 빼먹지 않았던 P님, 바쁜 와중에도 식당에 고장 난 일이 있으면 바로바로 고쳐주었던 J님, 맛있는 간식을 챙겨주던 L님, 일부러 장난스러운 말을 하면서도 항상 제 기분을 챙겨주던 C님, 장난스럽지만 마음은 착한 5명의 청년들 - 9명과 20여 명의 평범한 남자들과 70여 명의 나쁜남자들 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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