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에 들어서며 몇 년 동안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낸 적이 있다. 전공의 시절이었기 때문에 요구되는 일은 많았지만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에너지는 완전 바닥을 쳤다. 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에 밝은 척 힘들지 않은 척하며 돌아다녔지만 실상 내면은 병들어 가고 있었다. 나름 긍정적인 사람이라 자부했었는데 막상 힘든 일을 겪으니 긍정성이라는 포장지가 오히려 나를 더 힘들게 했다.
폭발하기 직전 겨우 짬을 내어 혼자 일본으로 짧은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평소 숲과 나무를 좋아하기 때문에 도쿄에 머물지 않고 바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하코네라는 곳을 찾아갔다. 일본의 유명한 국립공원이 근처에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예약한 저렴하지만 평이 괜찮은 료칸은 하코네 중심부에 있지 않고 산악열차를 타고 한 참을 이동해야 했다. 물어물어 겨우 찾아낸 숙소는 아주 작은 산악마을에 위치해 있는 외장이 노란색 페인트로 칠해진 낡고 조그마한 여관이었다. 료칸에 대한 환상이 있었기에 적잖이 실망했지만 인적이 드물고 조용한 시골마을에 손님이라곤 나 혼자 밖에 없다는 사실이 맘에 들었다.
주인 할머니가 안내해준 방은 한 평 남짓한 다다미방이었다. 정갈한 요가 깔려 있었고 작은 앉은뱅이 탁자가 전부였다. 하지만 밖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나무로 된 옛날식 큰 창이 매력적이었다.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짐을 풀고 숙소에 딸려있는 공용 온천에서 혼자 목욕을 한 후 마을 산책을 나갔다. 너무 작은 마을이라 관광객도 없었고 간간히 동네 아이들이나 어른신들을 마주 칠 뿐이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눈여겨봐 두었던 마을 구멍가게에서 맥주 두 캔과 과자 한 봉지를 사 들고 석양이 잘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를 펴고 앉아서 홀짝거리고 있었다. 마침 그때 이를 관심 있게 지켜보던 20대 후반 정도의 여자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거기에 오래 앉아 있으면 모기한테 물릴 텐데.”
일본어로 말을 걸어왔기 때문에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교환학생 시절 일본인 남자 친구를 사귀었던 경험이 있는지라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할 수 있었기에 더듬거리며 몇 마디 나눌 수 있었다.
“고마워요. 마을이 너무 예뻐서 구경하고 있었어요. 전 한국에서 여행 왔어요.”
“안녕하세요.”
“혹시 괜찮으면 이거 한 캔 드릴까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에게 맥주를 건넸고 우리는 석양을 보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앞으로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을까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것들에 대해 그녀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그녀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갑상선 암에 걸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요양차 할머니 집에 지내고 있다고 했다.
나의 소박한 일본어 실력 덕분에 섬세한 감정을 표현할 순 없었지만 우리는 아픔을 공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감이 어떤 말보다고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나만 아픈 게 아니었구나. 혼자 힘들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사실 지구별 어느 누군가 역시 아픔을 감내하고 있었구나.’
우리는 구태여 연락처를 주고받지 않기로 했다. 서로의 대나무 숲이 되어 행복을 빌어 주기엔 그 편이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와의 짧은 대화는 나의 마음가짐을 바꾸어 놓았다. 여행을 마치고 다시 업무에 복귀한 후 매일 감사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냥 오늘 하루가 주어진 것에 대해 내가 나인 것에 대해 감사했다. 그러고 나니 한결 생활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느리지만 긍정적인 변화였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라는 책으로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철학자인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두려움과 불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불안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이 순간의 좋은 일에 감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끝이 있고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규칙적으로, 의도적으로 잠깐씩 멈춰 서서 그 사실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들에 핀 꽃을 보고 탄성을 지르면 사람들은 당신을 패배자라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지금 꽃을 보고 감탄할 시간이 있느냐고, 원대한 꿈은 없느냐고, 야망이 그것밖에 안되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경험을 더 쌓고 시련의 파도를 넘고 넘다 보면, 언제부턴가 꽃 한 송이, 아름다운 구름, 모두에게 친절한 미소를 날리는 평화로운 아침 같은 일상의 사소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운명의 여신은 우리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인간은 그만큼 나약한 존재다. 해고에 대한 불안, 신체의 질병, 경제적 압박 등 조금만 상황이 틀어져도 우리는 쉽게 무너진다. 아주 약간의 좌절만으로도 그렇게 된다. 따라서 이 같은 나약함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별 큰일 없이 무탈하게 지나가는 하루에 진심을 다해 감사할 때 극복의 길이 열린다. 감사야말로 불안과 두려움을 보내오는 운명의 여신에게 맞설 수 있는 인간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다.”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나약한 인간이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무기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한 감사’이기에 불안하고 나약한 나는 오늘도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