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려냈던 순간
더글로리 시즌2가 나오고 문동은의 복수극이 막을 내렸다. 시즌1 때와 마찬가지로, 시즌2 역시 잔인하고 폭력적인 장면들이 있다고 들어 누군가가 블로그에 올려놓은 결말 요약본을 보며 '그랬구나'하고 말았다. 하지만 워낙 이슈를 끌고 있는 드라마이다 보니 유튜브 알고리즘까지는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영상을 보게 되었다. 어릴 적의 동은과 복수를 끝낸 동은이 생을 마감하려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때,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을 보았다. 에덴빌라의 할머니, 그리고 여정의 어머니. 마음을 울렸던 대사를 새기며 어느 날의 힘들었던 과거의 '나'들과 그런 '나'들을 붙잡아 주었던 많은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시도는 두렵고, 실패는 더 비참해
생을 마감하려는 순간은 때로는 아주 계획적으로, 혹은 급작스럽게 찾아온다. 나의 경우엔 충동적으로 찾아오는 순간들이 대부분이었다. 휘몰아치던 우울이 지나친 슬픔으로 다가올 때, 나는 이유 없이 슬퍼하는 나와 그런 슬픈 모습을 보는 나에 대한 죄책감을 느꼈다. 정신이 압도되는 불안을 느낄 때, 그런 공포를 더 이상은 겪고 싶지 않은 마음에 세상을 등지고 도망치고 싶었다.
죄책감과 회피는 나를 난간으로 이끈다. 그럴 때마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생각나서, 너무나 죄송하고 불효자인 생각임을 알고 있지만 제발 나를 데려가주셨으면 하고 기도했다. 8층의 베란다 난간에 폴더폰처럼 매달려 있다가, 주저앉아 울고 방 안으로 들어가기를 얼마나 많이 반복했던지. 아마 건너편 아파트 주민이 매번 나를 보았다면, 저 아파트에 귀신 산다고 흉흉한 소문이 돌았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은 너무나 세상을 떠나고 싶어서 맨발로 난간에 올라간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건대 그대로 뛰었다면 나는 이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잠옷 바람으로 서 있으면서 문득 실패한 시도들이 생각났다. 이 정도면 진짜 안녕이다, 했던 일들이 수포로 돌아간 날들. 실패였고, 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의 비참함이 훨씬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하지 않는 폐쇄병동에 들어가거나 말 그대로 신체 불구가 되는 것에 두려움 역시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해내고자 하는 바를 반드시 이루어내는 사람이 못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었다. 두려움과 비참함, 반대쪽에는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 사이에서 고통받던 시간은 참 괴로웠다.
다정한 손길과 약속된 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3년 3월, 나는 살아남아 이 글을 적는다. 괴로웠던 시간을 생각하면 그때의 힘들었던 감정보다 나에게 미래를 약속해 준 사람들과 그에 대한 기억들이 먼저 떠오른다. 미래를 약속한다는 일은 의외로 정확한 일정과 장소가 정해지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무언가 함께 하며 또 시간을 보낼 거야. 그것이 언제가 될지, 어디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다음에도 재미있는 여행지에 가자는 동네 친구들. 나와 함께하는 것이 재밌다며 우리 또 놀자,라고 밝게 웃던 룽. 말처럼 매번 카페에 가서 담소를 나누며 나중에는 근사한 여행지에 가자던 령. 초밥투어를 할 때마다 나랑 초밥을 먹는 것이 좋다며, 매번 헤어질 때 다음에는 또 맛있는 초밥을 먹자고 약속해 준 설. 집에 돌아가려 할 때마다 언제든지 또 놀러 오라고 인사해 준 이모와 이모부. 서귀포에서 제주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앞에서, 다음에는 좀 더 큰집으로 이사 갈 테니 그때는 집에서 밥을 함께 먹자는 엄마의 말.
다음에 또 만나자라는 타인의 약속 뒤에는 나와 당신들이 함께하는 이 시간이 행복하다는 마음이 느껴진다. 우리 오늘은 행복했으니, 다음에 또 행복하자. 그래서 나는 종종 사람들과 헤어지고 집에 가는 길에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다정함들이 감사했고, 또 감사했다. 아파트의 잠긴 옥상문을 바라보던 어제의 나를 후회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다정한 시간들이 많을 텐데.
내일까지 살아볼까. 다음 주에 세 달 만에 보는 혬을 만날 테니까 일주일까지는 더 살아볼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자 했으니 가을까지 조금만 힘을 내서 살아볼까. 그렇게 버티던 시간은 살아낸 시간이 되었다.
제목으로 적은 에덴빌라 할머니의 대사가 가슴을 후벼 판다. 삶을 마감하려다 우연히 어느 할머니를 살리게 된 문동은에게, 할머니는 일방적으로 죽지 말라는 말 대신 물이 너무 차니, 따뜻한 봄에 죽자는 말을 건넨다. 어느 겨울날, 서강대교 아래 검게 일렁이던 윤슬 어린 한강을 보던 날이 떠오른다. 지금도 너무 추운데, 지금 추락하면 강물 안은 더욱 춥겠지. 삶이 이렇게 춥고 공허한데 죽는 순간마저 춥겠구나 하고 엉엉 울었다.
어디서 이런 상황을 보고 있었는지 촉으로 느꼈는지 아는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소주 한 잔 털고 추우니까 집 들어가서 따뜻하게 푹 자라고. 나를 살린 또 다른 순간이다. 왜곡된 기억이라면 왜곡된 그대로 기억하고 있어야지. 평생 감사하며 살 수 있도록, 모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