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퇴원을 했습니다. 사월이 되기 전에요. 저는 행복합니다. 매일매일 꽃길을 걷고 있거든요. 봄바람 맞으며 공원에서 산책을 하니 꿈만 같습니다.
친정 엄마집 앞 공원을 가득 채운 벚꽃들. 벚꽃이 지기 전에 퇴원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리운 샘.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드디어 퇴원을 했습니다. 3월의 마지막 날에요. 시월의 마지막 날과 함께 제 남은 인생에서 영원히 기억될 날짜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이 순간의 기쁨과 흥분과 설렘과 감동을 잊기 어려울 것 같아요. 저의 담당의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분이었어요. 처음엔 좀 냉담하다 싶을 만큼 팩트를 가감 없이 말씀하셔서 지나치다 싶은 적도 많았습니다. 수술로 다 제거되지 못한 복부의 농양이 패혈증으로 이어져 사망의 위험이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설명에도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할 지경이었지요. 지금 당장, 한국에서, 항암부터 시작해야 맞다는 의사로서의 소신에 제가 그만 눈물을 쏟은 적도 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백 번 맞지만 지금 여기서 항암을 시작한다면, 제가 독일로 돌아갈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저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선생님. 혹시 못 돌아가게 될까 봐서요. 담당의가 말했다. 솔직히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 돌아가시기 어려울 수도 있고요. 옆에서 내 손을 잡고 있던 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제 동생에게는 어린 딸이 있답니다.아직 열두 살 밖에 안 됐어요.
왜 항암을 시작했어야 할 시기에 한국에 들어왔는지 납득하기 어려워서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담당의는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사실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운 비상식적인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 옆에 말없이 서 있던 젊은 여의사, 근무일이 아닌 주말 저녁에도 제 격리 병실에 들러 화상 소독을 해주던 그녀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더라는 얘기는 나중에 언니에게 전해 들었지요. 이 환자가 급할 때는 와서 임시 조치를 받고 다른 큰 병원으로 옮겨서 항암을 하려는 건 아닐까, 한국에서 항암을 하려고 귀국한 건 아닐가, 담당의로서는 여러 가지 의구심도 들었을 거예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럴 일은 없을 거라 말씀드렸어요. 수술 후 독일에서 곧바로 항암을 시작하지 않은 것은 제 실수였다는 것. 수술 후 두 달 밖에 안 된 시점에 한국에 돌아온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는 것. 비록 늦었지만 돌아가면 당장 가족들 곁에서 항암을 시작하겠노라 굳은 의지를 밝혔습니다. 그것이 남편의 뜻이기도 하고요. 그제야 담당의의 냉담하던 눈빛과 낯빛이 조금 누그러졌답니다.
처음에는 수술 후 체력을 키워 계획했던 날짜에 독일로 귀국하고 싶다는 말에도 회의적이던 담당의는 제가 열심히 걷는 모습을 보고는 생각을 바꾸신 모양이에요. 본인 환자 중 가장 모범적인 사례라고 슬쩍 칭찬을 던지신 적이 있거든요. 회진 때마다 별말씀은 없었습니다. 절대로 희망의 말을 남발하지 않는 분이었지요. 수술로 모든 농양을 제거하기란 불가능하다. 복부에 남은 농양을 계속 지켜보아야 한다. 탈장의 위험이 있으니 밤낮으로 복대 두 개를 착용하시라. 걷고 또 걸으시라. 주치의의 말씀을 십계명처럼 듣고 실천했지요. 복대 때문에 걸을 때마다 골반뼈가 으스러지듯 조여 오고, 복대 끝자락이 살을 파고들고, 숨 쉬기가 힘들고, 소화가 안 되고, 밤에는 잠을 이룰 수 없었어요. 그래도 목숨처럼 복대의 압박을 지켰습니다. 정말 힘들 땐 두 번째 복대를 조금 느슨하게 해달라고 간호사에게 부탁한 적은 있었지만요. 담당의가 퇴원을 언급한 건 하루 전날이었어요.식판을 펴고 이른 저녁을 기다리던 참이었지요. 다음날 오전에 마지막 CT를 찍어보고 괜찮으면 복부에 꽂고 있던 두 개의 관을 뽑자고 하셨어요. 그리고 무심하게 한 마디를 던지셨어요. 원하시면 그날오후에 퇴원하셔도 좋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죠. 그렇게 벼락치기로 퇴원을 했답니다. 여의사 선생님이 직접 주의사항을 프린트해서 오셨을 때 말씀드렸죠. 뮌헨에 도착하면 소식 전하겠습니다. 빈 말이 아니었어요. 두 분은 제 생명을 구해주신 은인들이시니까요.
언니네 집 앞 공원에 피고 지는 꽃들, 꽃잎들.
샘.
언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택시를 탔습니다. 정오의 햇살에 눈이 부셨습니다. 을지로에서 시청 지나 여의도 벚꽃도 구경하며 서울의 한 복판을 가로지르는 30분의 드라이브는 즐거움 그 자체였어요. 비로소 한국에 왔구나 실감이 들었죠. 곧장 친정 엄마 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상추쌈이 그렇게 먹고 싶더라고요. 상추 두 장에 독일에서는 구할 수 없는 쑥갓과 모둠 야채를 겹겹으로 올려놓고 밤 현미밥을 올려 쌈장에 싸 먹었습니다. 자연을 먹는 맛이었다고 해야겠네요. 얼마나 달고 싱싱하고 맛있던지요! 친정 엄마가 튼실한 밤을 사 와서 저녁마다 한 톨 한 톨 까서 듬뿍 넣은 현미밥은 얼마나 고소했는지 국을 떠주시기도 전에 밤부터 해치워버렸답니다. 배가 부르도록 따듯한 밥과 국을 먹고, 속이 시원하도록 야채쌈을 먹었어요. 엄마, 너무 맛있어! 언니야, 나 너무 행복해! 밥상머리에서도, 따끈한 매트가 켜져 있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서도 조금 과장하자면 백 번은 소리친 거 같아요.
오후에는 엄마와 언니 집 앞 작은 공원을 산책했어요. 고백하자면 독일에서 올 때 이 공원은 제 안중에도 없었죠. 아시죠? 그즈음의 저는 의기양양하고 자신만만했거든요. 제가 걸을 곳은 목동 쪽 안양천이거나 스케일 있게 한강변이었지, 할아버지 할머니 아이들이 밤낮으로 노는 손바닥만 한 동네 공원이 아니었어요.그런데 샘, 이게 웬일인가요. 환기도 안 되고 백 미터도 안 되는 좁은 병원의 복도를 걷다가 선선한 바람 불고, 햇살 가득하고, 벚꽃 핀 동네 공원을 걸으니 천국과 극락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원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 300미터의 산책길은 마치 저를 위해 준비한 맞춤형 산책길 같았답니다. 공원 한쪽 모서리의 깨끗한 화장실은 수시로 화장실을 가야 하는 제게 오아시스 같았고요. 30분씩 걷고, 15분씩 쉬었죠. 성실하게 걷다가 벤치에 앉아 하늘로 쭉쭉 뻗은 소나무를 볼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3월 한 달을 통째로 날렸지만 하나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저는 건강하게 살아 돌아왔고, 지금 이 시간 아름다운 봄날 꽃나무 아래를 걷고 있으니까요.
저녁엔 몹시도 갈치 구이가 먹고 싶어 졌어요. 친정 엄마의 생선 구이 솜씨는 가히 넘버 원이라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제사용 대형 생선도 작은 조기 새끼 구이도 엄마의 손만 닿으면 고소함이 극에 달하지요. 엄마는 넉넉하게 생선을 구우셨어요. 저 때문에 몹시도 마음 아파하던, 돌아오면 맛있는 거 원하는 거 다 사주라고 거금을 전했다는 형부까지 불러 좁은 식탁에 옹기종기 둘러앉았답니다. 이모가 직접 담아 보냈다는 된장은 또 어찌나 맛있던지요. 상추랑 배추랑 듬성듬성 잘라 무친 겉절이 또한 입맛을 다시게 했지요.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 나자 형부가 벌떡 일어나 조기 새끼 세일할 시간이라며 급히 마트로 갔습니다. 예쁜 짓 한 번 한 적 없는 처제인데 제가 살아 돌아와 너무 좋다고 딸기랑 사과랑 과일까지 무겁게 사들고 왔어요. 엄마뿐 아니라 형부와도 사이좋아지려고 왔나, 그런 생각까지 들었답니다. 4월에 서울 오신다는 샘과는 어떤 생선 구이를 먹을까, 하는 고민마저 제겐 즐거움입니다. 저의 사월은 결코 잔인하지 않을 겁니다. 제 생애 최고의 빛나고 빛나는 사월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사월에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샘을 만날 테니까요. 건강한 모습으로 뵐게요, 샘.
퇴원한 날 저런 길을 걷고, 저런 밥을 먹었다. 갈치 구이도 작은 조기 구이도 눈물나도록 맛있었다. 나는 다시 건강해질 것이다, 꼭!